아내와 처음 만났을 때는 휴대폰이 널리 보급되기 전이었다. 그래서 각자 집에 들어가기 전에는 전화로 연락할 방도가 없었다. 대신 당시 자취하던 내 방의 전화기는 녹음기능이 있어 메시지를 남길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왔을 때 자그마한 화면에 빨간 숫자가 깜빡거리고 있으면 그 만큼의 메시지가 녹음되어 있다는 표시였다.
그 숫자를 보면 기대감에 부풀었다.
누가 전화했을까.
결혼 전 아내는 전화기에 메시지를 자주 남겼다. 어떤 날에는 집 근처에 와서 전화했다가 메시지만 남기고 돌아가기도 했다. 아내의 메시지를 들으면 나는 만나지 못한 것이 안타까워 그 시간에 나를 불러낸 죄없는 친구나 선배를 원망하기도 했다.
그 시절에는 연애를 비롯하여 사람을 만나기 전 설레임이 컸다. 그 설레임의 원천은 기다림에 있었다. 즉각 연결될 수 없었기에 연결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고, 그리운 사람과 만나기까지의 기다림은 행복한 고통이기도 했다.
학자들이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유명한 실험이 있다.
아이들에게 쿠키 하나씩 주고, 정해진 시간 동안 먹지 않고 참으면 하나를 더 주지만 그 전에 먹으면 더 주지 않는다는 규칙을 정했다.
어떤 아이들은 기다리지 못하고 먹어버렸지만 어떤 아이들은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보기도 하며 참았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시간이 되자 쿠키 하나씩 더 받았다.
그 연구에 따르면, 이처럼 더 큰 보상을 위해 즉각적인 만족을 미룰 줄 아는 아이가 더 책임감 있고 독립적인 어른으로 자란다고 한다.
무엇이든 즉각적으로 만족하게 되면 흥미를 잃기 쉽다. 쉽게 얻은 것은 쉽게 나가기 마련이다. 로또에 당첨된 사람들 중 상금을 탕진하고 불행해진 사람이 많은 것도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여자는 튕겨야 한다는 말도 비슷한 맥락에서 나온 삶의 지혜다. 쉽게 넘어온 여자에게 남자는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계속 튕기기만 하다가는 남자도 튕겨져 나간다. 어느 순간에는 채워주어야 남자가 떠나지 않는다. 제인 오스틴의 미혼이었지만 이런 심리를 묘사하는 데 매우 능숙한 작가였다.
남자의 이런 심리를 최대한 활용한 여자가 루이 15세의 애인이었던 마담 퐁파두어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루이 왕의 눈에 들려고 애쓴 수많은 미녀들을 물리치고 그녀가 왕의 총애를 수십 년 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적절한 시간 동안 만족을 지연시키는 기술과 과하지 않게 채워주는 기술이었다고 한다.
남녀 평등 시대에 여자에게 마담 퐁파두어의 기술을 모방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녀의 노하우는 여러 방면으로 활용할 여지가 있을 것이다.
자기 주관을 뚜렷이 세울 줄 알면서도 고집스럽지 않고, 자기 자신을 존중할 줄 알면서도 유연하고,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되 일단 결정하면 이런 저런 계산을 하지 않고 아낌없이 다 주는 사람.
남녀 불문하고 이런 사람은 정말 매력적인 사람이다.
서재에서 꾸물꾸물 뭔가 하다 보니 배가 조금 고프기 시작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아내가 저녁을 준비하는 기척이 없으니 내가 차릴까, 하는데, 컴퓨터 앞에 앉아 일하던 아내가 말했다.
“아직 별로 안 시장하죠? 요거 마치고 저녁 할께요.”
“괜찮아. 마저 해.”
아내는 기다림의 미학을 아는 것 같다. 조금 더 기다리다가 먹으면 더 맛난 저녁 식사가 되리라.
배가 조금 더 고파진다.
조금 더 기다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