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양_#2.
봄이 막 시작되던 그해, 나는 동기들보다 조금 일찍 승진을 했다. 입사 5년 만에 변 과장이 된 나는 과분한 축하를 받으며 새로운 부서에 발령받았다. 첫 출근 날, 모니터 두 개가 놓인 내 책상을 정리하며 앞으로는 성실하게, 완벽하게 내 일을 해내겠다고 다짐하던 아침이었다. 그런데 내가 앉은 자리는 그 여자와 가장 가까운 자리였다. 지금 생각하면 헛웃음이 나지만
‘그건 내가 앉을 자리가 아니라 죽을 자리였지'싶다.
"너네 차장 소문 들었어?
그 사람 때문에 그만둔 직원이 한둘이 아니래.
본인 능력은 없는데, 아랫직원만 괴롭혀서 피말려 죽인다잖아. 그러니까 너, 절대 눈에 띄지 마. 조심해!"
입사 동기 다영이가 점심 먹고 돌아와 커피를 내밀며 말했다.
"에이, 난 그냥 내 일만 잘하면 되지 뭐.
그래도 조심할게. 고마워."
하지만 다영이는 거듭 말했다.
"우리 과장님 동기도 그 사람 때문에 퇴사했다더라.
원래는 회사에서 손꼽히던 에이스였는데.
아무튼, 절대 엮이지 마."
나는 한여름, 한낮에 태어났다. 역사상 가장 뜨거웠던 해의 가장 뜨거운 시간에. 그래서인지 늘 묵묵히 잘 견디는 성격이었다. 동기의 경고도 그냥 또 견뎌보라는 말처럼 들렸다.
‘뭐 어쩌겠어. 또 견디면 되지. 늘 그랬듯이.’
그날은 중요한 보고가 있는 아침이었다. 몇 주 동안 밤낮으로 보고서를 썼다. 총 180장. 보고를 준비하는 동안 그 여자는 수백 번의 수정을 지시했고, 나는 야근과 주말 출근을 반복하며 모든 수정사항을 성실히 반영했다. 늘 그랬듯이 그냥 열심히 했다.
한 여름 더위를 견디듯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보고 당일 발표가 시작되었고, 하얀 치마에 새파란 자켓을 입고 단상에 선 그 여자는 과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발표를 시작했다. 중간중간 내용과는 상관없는 예시를 들었다. 발표자에게 추가 질문이 이어졌지만 대답을 하지 못하는 부분이 생겼다. 급속도로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와중에 그 여자는 웃으며, 자켓 색깔 같이 새파래진 입술을 파르르 떨며 발표를 이어갔다. 이윽고, 숨막히던 프리젠테이션이 끝났다.
"오늘 보고를 들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이 부분에 대해서 더욱 고민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보고서를 직접 작성한 과장님께도 감사드립니다."
그 여자의 마지막 인사와 동시에 쳐다 본 본부장님의 안색이 좋지 않았고, 그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회의실을 떠났다. 그리고 모두가 떠난 그 회의실에서 회의자료를 정리하려던 나는 그날 따라 요란했던 휴대폰 진동에 급히 문자메시지를 봤다.
'변과장, 지금 옆 회의실에서 봐요.'
회의실에 들어가자 그녀는 푸른 자켓을 의자에 걸쳐둔 채 서 있었다. 그리고 다짜고짜 보고서를 내 앞에 세게 던졌다. 200장에 가까운 종이가 흩날리며 바닥을 굴렀다. 나는 그 종이들을 보며 당황스러워서 잠시 생각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이게 보고서야? 일부러 이딴 식으로 쓴 거잖아.
너 나를 무능하게 보이게 만들려고 작정했지?!"
둘만 남은 회의실에서 그 소리는 메아리쳤다.
그 보고서는 지난 한달여간 오로지 그 여자의 지시로 수십 번의 수정을 반복하며 쓰여진 것이었는데-
"차장님, 한 달 동안 지시하신 대로 수십 번 넘게 수정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가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여자는 바닥에 널브러진 종이들을 줍더니, 갈기갈기 찢어 바닥에 내던졌다.
형광펜 흔적과 볼펜 자국이 찢어진 종이 위로 알아볼 수 없게 어지럽게 엉켰다.
‘아-앞으로 내가 저 찢어진 종이와 형광펜처럼 어지럽게 엉켜버리겠구나..’
나는 그 순간 직감적으로 다가올 미래를 알았던 것 같다.
"네가 과장이랍시고 여기 앉아있는 게 웃기지 않니?
넌 그냥 민폐야. 여기 있을 자격 없어. 내가 언제 이렇게 작성하라고 했어. 내용이 맞는게 하나도 없잖아."
나는 얼어붙은 채 서 있었다.
“거기 앉아. 보고서 전부 다시 짚어봐.”
그리고 밤 10시가 넘도록 그녀는 내게 욕설과 모욕을 퍼부으며 200장 가까운 보고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하나하나 수정하도록 했다. 그건 '지시'가 아니었다.
몇 시간에 걸친 인격 학살이었다.
"내일 아침까지 전부 수정해서 내 자리 위에 올려놔."
시계를 보니 밤 10시 20분이었다.
그 여자는 회의실을 떠났고, 나는 까맣게 덮인 수정 흔적을 멍하니 바라보며 한참 앉아 있었다.
눈물이 두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날이 시작이었다. 새로운 각오로 부서를 옮긴 지 딱 한 달 만의 일이었다.
그런 고통의 시간들을 나는 그냥 견뎠다. 회사에 알릴 수도 있었고, 권리를 주장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참고 견디는 방법에 익숙했고, 권위적인 회사 분위기에 맞서 싸울 용기가 없었다. 그저 그 시간이 가길 참는 방법을 선택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나는 결국 깨달았다.
‘나는 그 여자가 날 침범하도록 허락했구나.
맘껏 날 무너뜨리도록..
그리고 그 여자는 누구보다 나의 허용을 빠르게 알아챘던거였구나’
그 깨달음 뒤엔 엄청난 괴로움과 자책이 밀려왔다. 그리고 남에게 나를 파괴하도록 맘껏 내 자신을 내어주고 결국 혼자 쓰러져 한껏 웅크려 울고 있는 나만 있었다.
나 혼자서만 있었다.
어느 날은 내가 하루종일 그 여자에게 시달림을 당하고 견디기 힘들어 화장실에 가서 한참을 울고 자리에 온 적이 있었다. 눈이 빨개져서 모니터를 멍하게 응시하고 앉았는데, 화면에 메신저가 알람이 울렸다. 그 여자였다.
‘변 과장님, 때문에 힘들지? 오늘 끝나고 뭐해?
같이 차 한잔이나 저녁 먹었으면 좋겠어’
난 여러 핑계를 대며 극구 사양했지만 결국 퇴근 후 3시간 동안 회사 근처 카페에 가서 그 여자의 신세한탄과 나의 잘못에 대해 들어야만 했다. 그러다 다음날 출근하면 또 다시 싸늘한 얼굴로 단 둘만 있는 회의실로 날 불러 세웠다. 새로운 업무보고를 하거나 간단한 전달 사항을 그저 전달만해도 그 여자는 나를 따로 불러내어 하나하나 물으며 본인의 기분에 따라 나를 몰아세웠다. 물론 그런일은 단 둘이 있을때만 벌어졌다.
그렇게 끔찍한 일상과 괴롭힘의 반복이 계속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견디고 견디던 시간이 1년을 넘고 2년이 가까워 지자 나는 결국 깨달았다.
'나는 지금까지 그 여자가 날 침범하도록 허락했구나. 맘껏 날 무너뜨리도록 허용했구나.
그리고 그 여자는 그걸 알아채고 날 파괴시킨거구나. 결국 나는 나를 지키지 못했구나..'
그리고 그저 견디는 방법밖에 몰랐던
내가 가엽고 또 가여웠다.
그 시절의 나 자신에게 사과하고 싶다.
견디는 방법밖에 알려주지 않아 미안하다고. 앞으로는 혼자 웅크리고 쓰러질 때까지 두지 않겠다고.
“내가 당한 게 올바른 지시가 아니라 내가 타겟된 지독한 가스라이팅이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제일 괴로웠던 게 뭔지 아세요?
날 괴롭힌 그 괴물 같은 사람이 아니라요.
날 방치해두고, 그 사실조차 몰랐던 내 자신에 대한 자책이었어요.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요?
날 괴롭힌 건 내가 아니잖아요.
다른 사람이 날 그렇게 대했는데,
나는 또다시 나에게 책임을 지우고 있더라고요.
교통사고 낸 사람이 아니라 사고를 당한 사람에게 왜 사고를 당했냐고 몰아부친 격이죠.
만약 과거의 나에게 돌아갈 수 있다면,
그 날 처음 괴롭힘을 당하던 그 회의실에 홀로 앉아 있던 나에게 가고 싶어요.
그리고 말해주고 싶어요.”
네 잘못이 아니야.
너를 지켜. 너를 지키는 사람이 돼.
넌 그럴 자격이 있어. 그게 네가 살아가는 이유야.
견디기만 하기엔 너는 너무 반짝거리고,
네가 꾸는 꿈은 눈부시게 아름다우니까.
일어나서 너 스스로를 지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