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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나는 병명이 생긴 사람이야. 공황장애 및 우울증.

서공양_#4

by 윤달


‘나는 잘 살아보려고 온 힘을 쏟았는데,

결국 얻은 건 병명뿐이구나.

난 버틴 게 아니라 무너진 거였구나.

어쩜 이렇게 초라할 수 있을까?’


집에 돌아와 그날 일기장 맨 첫 줄에 쓴 문장이었다.

다음 진료일 7월 25일까지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생각을 하다 문득—


‘아— 맞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했지.’


이내 나는 침대로 다시 기어들어갔다.

정신과 진료실에서 '공황장애 및 중증도 우울증'이라는 병명을 진단 받고 나왔을 때, 내 손에 쥐어진 예약증은 종이가 아니라 37년 삶의 실패를 증명하는 차가운 비석처럼 느껴졌다.


나는 37년간 몸이 아픈 기억이 별로 없는 건강한 사람이었다. 그런 내게 정신병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것 같았다. 그다지 달갑지 않은 꼬리표 말이다. ‘중증’이라는 단어까지 붙은 그 병명에 나는 그동안 온 힘을 다해 버텨온 내 인생의 모든 날들이 결국 이 병명 두 개로 귀결된다는 느낌에 너무나 억울하고, 분하고, 절망스러웠다.


지난 2년간 내가 나를 방치한 대가일까,

아니면 그동안 살아오면서 늘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기만 하고 내 자신은 돌보지 않은 내가 감내해야만 하는 벌일까. 그 어떤 쪽도 싫었다.


나는 그동안 무언가를 하지 않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 끊임없이 계획하고, 움직이고, 성취해야만 내가 살아있다고 느꼈다. 20대의 나의 목표는 하나였다.


‘내 삶을 컬러풀하게 만들자’


그래서 나는 열심히 무지개빛으로 나의 20대를 채웠다. 다채로운 색으로 그 시간을 채우려니 나는 늘 무언가에 쫒기듯이 바빴다. 대학을 졸업하고, 내 힘으로 유학을 갔다.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일을 했다. 스스로 돈도 벌고, 공부하며 여러가지 경험도 쌓았다. 그렇지만 늘 잘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고, 더 잘할 수는 없는지 스스로를 몰아부쳤다. 그러다가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문제의 원인을 나에게서만 찾으려고 했고, 다음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그렇게 애쓴 나를 채찍길 하기 바빴다.


그래서일까?


결국 내 20대는 남들보다 비교해봐도 열 가지 색은 족히 넘는 무지개가 되었다. 삶은 컬러풀한 무지개가 되었는데, 정작 나 자신은 방치되어 회색빛 무채색으로 여기까지 온 것 같았다. 내가 만들고 싶은 내 인생은 무지개빛 이었는데, 정작 내 자신은 칙칙한 모노톤의 회색빛이라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


‘어처구니가 없다. 회색빛 변 과장.’


한국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회사에서도 더 잘하고 싶었다. 그리고 더 높은 기준을 만들고 나를 그 기준에 우겨 넣을 때도 많았다. 잘 우겨 들어간 내 모습을 보면서 만족하는 것 도 잠시, 어떻게 더 완벽히 그 목표에 다가갈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러다 보니 후순위가 생겼다.


그건 바로 ‘내 자신’.


사랑도, 가족도, 그리고 내 자신도 모두 그 다음이었다.

그렇게 살아온 나는 지난 2년의 시간을 결국 견뎌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스스로 붕괴되었다고 생각했다.


‘그 많은 부서 중에 그 많은 직원이 있는데,

왜 하필 내가 그런 상사를 만났을까?

그리고 난 왜 더 견디지 못했을까? 그 사람이 왜 날 침범하도록 두었을까? 그게 최선이었을까?...’


온통 이런 생각이 내 머릿속을 휘저었다. 가만히 있어도 당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몸을움직이지 않아도 머릿속이 너무나 가열차게 움직이니 감정의 허기가 지는 느낌이었다. 선생님이 먹고 싶으면 먹으라던 약들을 꺼냈다. 얼른 한 봉지를 입에 털고 미지근한 물 한 컵을 가득 마셨다. 이내 졸음이 밀려왔고, 어느 순간인가 잠들었다.


그렇게 한 달을, 무려 열 가지 색을 가진 그 무지개는 드넓은 하늘이 아닌, 내 방의 침대 위 좁은 천장에 떠 있었다. 그리고 그 무지개를 가진 회색빛 주인인 나는 아주 가끔 화장실에 가거나, 억지로 밥을 먹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 작은 움직임조차 온몸의 근육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이었다. 숟가락을 드는 내 손이 무겁게 느껴졌고, 입에 넣은 밥은 모래처럼 서걱거렸다. 맛도, 냄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입맛이 없는 게 아니라, 내 삶의 맛 자체가 사라진 기분이었다. 삶의 의욕과 함께 오감마저 마비된 것 같았다.


‘이런 초라한 천장 위에 뜨라고 그렇게 애써서 만든 컬러풀한 내 무지개가 아닌데… 내가 그것들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노력한 건데… 결국 이렇게 내 인생은 실패로 끝나는구나.. 너무 억울해…’


그 중에서도 가장 괴로웠던 시간은, 의사가 처방해 준 약을 먹는 순간이었다. 물을 마실 기력조차 없어, 약을 입에 털어 넣고 우걱우걱 씹었다. 씁쓸하고 비릿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나는 일부러 쓴맛을 오래도록 음미하며 텅 빈 나를 느꼈다. 고통은 더 큰 고통으로 누르던 나의 모습이 여과없이 또 드러난거였다.


‘이 약들이 종이처럼 구겨진 나를

다시 펴줄 수 있을까?’


의심과 희망 사이에서 약을 삼켰다. 약을 먹으면 온몸에 힘이 빠지며 잠이 쏟아졌다. 가끔 그 꿈속에는 회사에서 끝나지 않는 문서를 작성하는 내 모습이나 나를 쉴새 없이 본인자리로 부르던 그 여자의 앙칼진 목소리 혹은 남들은 모르게 나에게만 보내던 그 매서운 눈빛이 나오기도 했다. 끔찍했다.


잠에서 깨면 다시 공허함이 밀려왔다. 나는 나에게 가장 악독한 가해자였다. 그 여자가 내게 퍼부었던 모든 모욕적인 말들보다, 나 자신이 나에게 했던 비난의 말들이 더 깊은 상처를 남겼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의사의 처방은 나에게 새로운 고통을 안겨주는 듯 했다. 늘 무언가를 해야만 안심했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서 극심한 불안을 느꼈다. 나라는 사람이 게으르고 한심한 나약한 존재로 전락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한 달이라는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그냥 희미한 안개 속을 끝없이 헤매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문득, 불 꺼진 방에서 내 모습을 마주했다. 엉망이 된 머리카락, 푸석해진 피부, 그리고 초점 없는 눈동자. 거울 속의 나는 내가 꿈꾸던 생기있고, 컬러풀한 변 과장이 아니었다. 나는 거울을 바라보며 소리 없는 울음을 터뜨렸다.


이젠 울 힘조차 없는 사람처럼,

그저 텅 빈 눈으로 눈물만 뚝뚝 흘렸다.


그리고 암막커튼 속 어둑한 방안에서 나는 펜을 들었다. 오랜만에 일기장을 폈다. 먼지가 쌓인 일기장 첫 페이지에 나는 꾹꾹 눌러썼다.




‘이 긴 고통과 어둠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된다면 나는 ….’









“낮이 가면 해가 지고, 밤이 와요. 그런데 밤이 왜 오는지 묻는다면,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요?

어둠이 싫어서 밤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한다면, 또 뭐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데 그거 있잖아요.

그냥 밤이 올 때가 되어서 그냥 어두워진 것 뿐이에요.

지금 ‘그때 내방 천장에 떠있던 내 무지개’를 생각해보니까요. 그냥 일어날 일이 일어나야 할 때 일어난 것 뿐이라는 걸 알겠더라고요. 하지만 그땐 그걸 몰라서 너무 억울하고 슬펐어요.


난 그저 30대가 된 내 하늘에,

내가 열심히 채운 열 가지 색의 알록달록한 무지개를 멋지게 띄우고 싶었을 뿐이었거든요.

그런데 예고없이 큰 태풍이 온거죠.


내 마음이 그 어두운 밤 하늘에 갇히니까, 그 무지개가 평생 내 방 좁은 천장에만 갇혀 있을 것만 같더라고요. 무려 열 가지 색을 가진 무지개인데 말이죠.


크레파스나 물감도 색깔 여러 개면 더 비싼거 알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는 다시 뜨고 눈이 부시도록 밝은 낮은 분명히 오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보니 그저 웃음이 나요. 당신의 무지개도 분명 다시 넓은 하늘에 예쁘게 뜰 거라고 생각해요. 그건 정말 확실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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