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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불완전했던 내가, 그 불완전함을 너의 사랑으로

서공양_#5

by 윤달

불완전했던 내가,

그 불완전함을 너의 사랑으로 채우려고 떼를 썼어..


내가 승진하던 그해 봄이었다. ‘정직한 로봇’ 같은 남자가 내 앞에 나타났다. 그는 오똑한 콧날에 쌍꺼풀 없는 눈을 가졌고, 큰 키에 검은 뿔테 안경이 하얀 얼굴을 더 희게 만들어주는 그런 남자였다.

그리고 유독 말수가 적었다.


‘정직한 로봇’이란 어떤 것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로봇 같은 사람이고, 로봇 같이 정직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기계나 로봇은 보통 데이터대로 정직하니까.


‘그런데 사람이 정말 로봇일 수 있을까?’


그건 내 오산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로봇도 상처를 입고, 울고, 아프다. 우리는 회사에서 처음 만났다. 내가 부서를 옮기며 사무실을 바꿨고, 그 때문에 같은 엘리베이터를 사용하게 되었다. 나는 16층, 그는 17층이었다. 난 한눈에 그를 알아봤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알아봤다.


‘내가 저 남자를 사랑하게 되겠구나—’


월요일 아침, 달려와 비집고 탄 엘리베이터에 그는 내 바로 옆에 서 있었다. 그 얄궂은 운명 속에서 ‘아- 사람은 옆으로도 누군가를 볼 수 있구나-’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날이 딱 그랬다. 그 이후로 나는 그와 주로 같은 엘리베이터와 동일한 회의실을 사용했기에 자주 마주쳐 가벼운 인사를 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사내 연애는 절대 안 돼. 회사에서는 일만 하자. 괜히 복잡하고 성가신 일 만들지 말자.’


나는 꽤나 고지식하고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공과 사를 분명히 하고 싶었다. 깔끔하게 회사 생활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 놈의 운명은 만나야 할 사람을 꼭 내 앞으로 데려오고, 또 나를 꼭 그 사람의 시야에 가두는 것이 아닌가? 어디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되던 적이 살면서 몇 번이나 있었을까?


‘인간의 힘으로 파도처럼 밀려오는 그것들을

어떻게 거스를 수 있을까?’


그 날은 하루 일정으로 외부에서 부서 워크숍을 하는 날이었다. 여느 회사 워크숍이 그렇듯이 모든 직원의 머릿속에는 ‘빨리 끝내고 집에 가고 싶다’는 공통된 생각이 피어오르던 나른한 오후였다. 그날 행사 중, 나와 친한 주임님이 다가와 생글거리는 웃음으로 말했다.


“과장님, 오늘 끝나고 뭐 해요? 볼링 치러 갈래요? 같이 가요!”


나는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있지만, 사람에게는 별 관심이 없다. 또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나는 사람이 좋지만 사람과들의 피상적인 관계는 싫다. 어떻게 핑계를 대어 거절해야 주임님의 기분이 상하지 않을까 생각하던 중 갑자기—


“17층 직원들이랑 같이 가기로 했어요. 가자! 볼링 가자!”


나도 모르게 그 ‘정직한 로봇’이 떠올랐다. 정신을 차려보니, 시끄러운 음악이 울리는 볼링장에서 공을 굴리고 있는 내가 있었다. 마음이 이렇게 무섭다. 감정은 싫은것도 하게하고, 사람의 엉덩이를 이렇게나 가볍게 만들기도 한다. 시끌벅적한 볼링장에서 동료들과 짝을 맞춰 2시간 쉬지 않고 볼링을 쳤다.

물론 거기엔 그 정직한 로봇도 함께였다.


그 자리가 끝나고 집에 가려는데, 같은 방향으로 가는 사람은 우리 둘뿐이었다. 우리는 무려 여섯 정거장을 걸었다. 버스타면 10분이면 갈 거리를 한 시간 동안 걸었던 것. 마음은 때로 사람을 느리게 만든다.

마음은 이래서 웃기다.


“저는 되게 바쁘게 살아왔거든요. 뭔가 제가 쉬는 꼴을 못 보겠어요. 늘어져 있으면 약간 죄책감이 들어요. 말 타는 거 아세요? 말 탈 때 궁둥이를 찰싹찰싹 채찍질하듯 내 엉덩이를 어찌나—”


갑자기 내 엉덩이를 때리는 시늉을 하며 신나게 말하던 나는 ‘아차!’ 싶었다.


“아, 제가 제 엉덩이를 때렸다는 말은 아니고요. 비유하다 보니 말 타는 게 생각났어요.이게 아닌데…

아, 아무튼 오해하지 마세요.”


손사레 치며 묻지도 않은 말을 해명하는 내 모습이

우스웠는지 그는 씩 웃으며 말했다.


“오해 안 했어요. 이상한 생각도 안 했고, 그 ‘찰싹찰싹’ 소리가 오늘 잠들기 전에 또 생각날 것 같아요.

그리고 엉덩이도..”


그날 밤, 우리는 별로 시덥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몹시 시덥게 나누며, 웃지 않아도 되는 타이밍에 웃음을 터트리며 함께 밤거리를 걸었다. 어느 연인들의 시작처럼 우리도 서로를 알아봤고, 기꺼이 서로의 세계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우리는 평소처럼 매일 아침 같은 엘리베이터를 탔다. 내가 내리는 뒷모습을 그가 바라보면, 나는 그런 그를 뒤로하고 숨막히던 16층에 내렸다. 그런 이유로 내 뒤는 따뜻했지만, 내 앞에 있는 사무실은 늘 살얼음판 같았다.


매일 아침 엘레베이터 안에서 그가 내 등 뒤를 따뜻한 눈길로 배웅했지만 그 시간은 아주 잠시였을 뿐이었다. 16층은 나를 매일매일 숨 막히게 했다. 그 여자가 날 따로 불러내 업무 이야기를 하는 날이 갈수록 늘어났고, 그 시간은 가늠할 수 없었으며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지시가 이어졌다. 매일 같이 지시하는 일을 해도 내 업무는 줄지 않았다. 야근은 물론이고 주말 출근도 부지기수였다. 그런데도 일이 줄지 않았고, 그 여자의 비난과 질책은 하루가 다르게 강해졌다. 그럴수록 나의 일상은 완전히 붕괴되어 갔다.


그 당시 나는 남자친구에게 회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연인은 가장 친한 베스트프렌드였을 테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 역시 새로운 프로젝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고, 집안에도 좋지 않은 일이 있었다. 그런 그에게 오늘 내게 있었던 모든 일을 말하며 위로해달라고 할 수가 없었다. 괜찮은 척하며 되레 그의 안부를 묻는 일상이 계속되었다.


그것은 나의 완벽한 오만이었다.


‘나는 사랑할 때도 징그럽게 잘 견딘다. 한여름 폭염을 견디듯, 한겨울 한파를 견디듯.’


그래도 그 시절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내게는 유일한 휴식과 안정이었다. 내 옆에 있어주는 그에게 고마웠다. 하지만 괴롭힘이 심해질수록 나는 내 자신을 더 몰아붙였고, 그 과정에서 쌓인 불안과 감정들이 나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그렇게 예민해지고 지친 나는 그에게 서서히 상처를 주었다. 내가 그에게 날카로운 말들을 하는 날이 늘어났고, 그런 말을 하고 돌아서면 후회하고, 늘 마음이 아팠다.


‘지금 문제는 남자친구와 내가 아니잖아. 이러지 말아야지. 다시는 상처주지 말자.’


하지만 내 생각과는 다르게, 괴롭힘으로 인해 내가 살던 방식과 삶의 철학이 흔들리는 혼돈이 매일 쌓여갔고 그 속에서 나는 어리석게도 그의 사랑으로 내 안의 불완전함을 채우려고 했다.


로봇 같던 남자친구는 무던한 감정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그도 우리의 다툼 이후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했다. 나는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진짜 문제를 보려 하지 않았다. 네모 모양 구멍을 세모 모양 뚜껑으로 억지로 덮으려 했다. 그리고는 그에게 왜 더 날 사랑하지 않느냐고, 너는 나를 사랑하는 게 맞느냐고 계속해서 물었다.


‘날 더 사랑해 줄 수 없어? 내 마음이 지금 불안정하고 두려운데, 더 큰 사랑으로 이 칙칙하고 어두운 것들을 덮어 줄 순 없어? 넌 날 그 정도로 사랑하지 않는 거야.’


나는 그렇게 거의 2년 동안 로봇 같던 그의 마음에 수없이 많은 생채기를 냈다. 그렇게 하면 내 안의 불안과 괴로움이 해결될 줄 알았다. 사실 내가 직면해야 했던 것은 나를 침범하는 상사에게 내 권리와 가치를 알려주고 당당한 원래 내 모습을 찾는 일이었지만, 나는 엉뚱한 곳에서 떼를 쓰고 있었다.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며 서로를 바라보던 우리는, 같은 패턴의 갈등과 싸움으로 서서히 지쳐갔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심한 즈음 우리는 헤어졌다.

정직한 로봇 같던 그가 나에게 했던 마지막 말이 아직도 선명하다.


“어느 날 꿈을 꿨는데, 회사에서 당신이 큰 실수를 한 거야. 그래서 내가 그 일은 모두 내가 한 일이고, 당신은 잘못이 없다는 내용의 쪽지를 써서 전체 직원들에게 사내 메시지를 보냈어. 꿈속이었지만 당신이 그 일로 다칠까봐 얼마나 마음이 조급하던지. 꿈에서 깨고 나서도 한참을 ‘꿈이라 다행이다’라고 혼자 중얼거렸어. 사실 우리 엘리베이터 타기 전부터 난 당신을 알고 있었어. 하늘거리는 블라우스에 긴 머리칼을 쓸어넘기면서 지나가는 걸 자주 봤었어. 그리고 늘 생각했지. 내가 꼭 그 옆에 있고 싶다고. 그런데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난거야. 난 그것만으로도 정말 행복했어. 고마워.”


나에게 헤어진 남자친구는 고인(故人) 같은 존재다.

죽으라는 뜻은 아니고, 그 만큼 헤어짐과 동시에 그와 나의 세계를 완전히 분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그럴 수가 없었다. 내 안의 불완전함을 남자친구로 채우려고 했던 과거의 내 자신이 이제는 보인다. 그래서 그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다.


그 때로 돌아가 내가 했던 모든 어리석은 행동과 말들. 모든 것을 다시 주워 담을 순 없겠지만, 그때의 어설프고, 거칠었던 우리 사랑의 결말에 당신 잘못은 작은 모래알만큼도 없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사실 나도 그 엘리베이터에 타기 전부터

당신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그 시절의 불완전했던 나는 나 스스로에게도 위로는 커녕 더욱 박하게 대했어. 그런데 그때 날 사랑하는 네가 내 옆에 있었던거야. 사실 불완전한 날 원망하고 싶었는데, 그게 싫어서 나 대신 널 원망했나봐.

네가 날 사랑한다는 이유로 말이야.


그 시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으니,

지난날의 너를 따뜻하게 안아줄 순 없지만 그때 누구보다 불완전했던 건 바로 나였어. 네가 내가 준 사랑은 완벽했어. 그 불완전함은 내 스스로가 채웠어야 했는데, 그때는 그걸 모르고 네가 그걸 채워주길 바랐던 것 같아. 미안해. 진심으로 미안해. 꼭 행복하게 잘살아. 따뜻하게 잘살아.


정직하고 그리고 따뜻했던 나의 로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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