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목소리가 생각나는 맛
‘할머니’라고 하면 보통의 사람들을 친할머니나 외할머니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할머니’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우리 이모할머니다. 친할머니의 동생. 아버지의 이모.
내가 어렸을 적엔 서울의 한 주택에 살았는데 한동안 1층엔 우리 가족이, 2층에는 이모할머니가 지내셨었다. 할머니는 그 시절 다른 어르신들과 마찬가지로 뜨개질을 즐기고, 바느질과 요리 솜씨가 뛰어난 분이셨다.
내 기억 속에 할머니는 항상 EBS에서 나오는 요리 방송을 보고 계셨는데, 그 당시에는 녹화도 쉽지 않았고, 스마트폰이나 촬영이 가능한 휴대전화도 없었기 때문에 항상 TV 앞에서 메모지와 볼펜을 들고 레시피를 적곤 하셨다.
무뚝뚝하고 무서우셨던 친할머니와 달리 따뜻하고 다정했던 이모할머니는 항상 맛있는 음식을 해주셨는데, 일상적인 식사 메뉴는 물론이거니와 특히나 내가 좋아했던 메뉴는 사리 곰탕 면과 소고기 고추장이었다. 짭짤 고소한 사리 곰탕 면은 점심 대신 먹기 정말 좋았고, 매콤 달콤한 소고기 고추장은 자려고 누우면 꼭 생각나는 마성의 맛이었다.
그때 당시 우리 옆집엔 내 소꿉친구가 살고 있었고, 우리는 자주 내 방에서 같이 잤다. 할머니가 소고기 고추장을 잔뜩 해놓으신 밤이면 나는 친구를 불러 가족들이 잠든 밤, 몰래 소고기 고추장에 밥을 비벼 먹곤 했다.
따끈한 쌀밥에 차가워진 소고기 고추장을 한 스푼 넣어 비벼 먹으면 다른 반찬도 필요 없었다. 매콤 달큼하고 감칠맛 나는 고추장 양념에 한 번씩 씹히는 갈아 넣은 소고기가 한입 먹을 때마다 사라지는 것이 아쉬울 정도였달까.
30대 중반이 넘어가는 지금, 우리는 아직도 그 새벽에 몰래 먹던 맛을 잊지 못하고 만날 때마다 이야기한다. 친구의 말로는 그 맛이 잊히지 않아 몇 번 도전했지만, 그때 먹었던 그 맛이 나질 않는단다. 이모할머니는 내가 아직 어렸을 적에 돌아가셔서 그 레시피는 영영 알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가끔 할머니가 생각날 때면 항상 입맛의 끝에 그 고추장의 맛이 은근히 느껴졌는데, 본격적으로 요리를 시작하고 나서 만들어 보려고 하길 여러 번. 내공이 부족했던 건지 항상 그 맛은 나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 전, 왠지 이제는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다시 도전해 봤는데 세상에나. 바로 그 맛이었다. 눈물이 날 뻔했다.
눈물 나는 소고기 고추장 레시피
1. 다진 소고기는 뭉치지 않도록 잘 풀어 끓는 물에 2분 정도 데쳐준다.
2. 양파는 다지기나 칼로 잘게 다지고, 마늘은 시중에 파는 간 마늘보다는 통마늘을 입자가 느껴지게 다져준다.
3. 팬에 참기름을 약간 두르고 다진 마늘을 볶아 향을 내준다.
4. 3에 양파와 데쳐놓은 고기를 넣고 양파가 살짝 투명해질 정도로 볶아준다.
5. 고추장을 고기와 양파보다 훨씬 넉넉하게 넣고 물엿을 5큰술 정도 넣어 끓여준다.
6. 기포가 1~2초 간격으로 끓어오르면 불을 끄고 참기름 반 스푼과 통깨를 넣어주면 완성이다.
(농도는 개인의 취향에 맞게 묽거나 빡빡하게 만들어도 되는데, 이모할머니표 고추장은 시중 고추장보다는 묽은 정도면 좋다.)
고추장이라고 하면 음식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 곁들이는 소스 정도로만 생각할 수 있다. 이런 메인이 될 수 없을 것 같은 음식도 어떤 기억을 가지고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서 훌륭한 식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나에겐 해가 지날수록 이제는 목소리도 거의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를 또렷하게 기억할 수 있게 해주는 고마운 음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