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빚은 망각

by 전지시

길고 긴 여름 한철, 마당에 묵묵히 쌓이던

모래알 같은 그리움도 이제는

모두 흙이 되어 흩어지는가.


그때는 젖은 옷자락처럼 축축하게 스며

하루에도 몇 번씩 뼈마디를 시리게 하더니,

이제는 아, 한겨울 아랫목의 따스한 공기처럼

그저 순하고 덤덤한 기억의 뒷모습.


그이의 이름 석 자, 한때는 벼랑이었다.

숨결 한 번 잘못 쉬면 곧장 떨어져 산산이 부서질

그런 아찔한 아픔의 모서리였다.


헌데 세월이 깎아내는 풍화의 이치인지,

단단하던 벼랑도 둥글게 다듬어지고

모서리는 뭉툭해져 손에 쥐어도 상처가 없다.


냇물이 흘러가 돌을 잊듯

바람이 불어 먼지를 털듯,

모든 사연은 결국 제자리를 찾아가는 법.


어쩌면 사랑이란 밤사이에 내린 서리 같아서

아침 햇살에 흔적도 없이 녹아버리는

덧없고도 참된 세상의 이치이더라.


잊지 못할 줄 알았던 그이의 얼굴도,

문득 어느 날 아침 깨끗이 씻긴 유리처럼

더는 습기를 머금지 않은 채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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