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떠나야 했던 이유들

후회를 견디는 방패를 드는 일

by 전지시

우리는 헤어짐을 결심할 때 마치 시험지의 뒷면에 답안지를 써 내려가듯 모든 이유들을 줄줄이 적는다. 연락이 뜸해졌고, 말투가 변했고, 같이 있어도 외로웠고, 기대한 만큼 돌아오지 않았고, 가치관도 어긋났고, 그리고… 그리고…


사실 그 목록은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상대가 아닌 나 자신을 설득하기 위한 방어선이다. “잘한 선택이야. 후회하지 마.”라는 메시지를 과거의 나에게 남기기 위해 우리는 논리를 만든다. 감정은 혼란스럽고 애매하지만 이유는 분명해 보이니까. 말로 설명할 수 있는 형태가 되면 그 이별은 조금 덜 아프고, 조금 더 이해 가능한 일이 된다.


이건 합리화일까? 어쩌면 그렇다. 하지만 꼭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다. 누군가를 떠나는 결정은 언제나 뿌리부터 흔들리는 고통을 동반하니까. 그 결정을 끝까지 밀고 나가기 위해선 의심을 밀어내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는 장치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이유를 나열하는 행위는, 마음의 균형을 잡으려는 몸부림에 가깝다. 쓰러지지 않으려는.


또 한편으론 후회를 피하려는 사전 작업이다. 언젠가 혼자 방 안에서 그 사람의 이름을 중얼거릴지도 모르니까. 그때를 대비해, 이별의 증거들을 파일처럼 저장해두는 것이다. “봐, 이런 일들이 있었잖아. 그러니까 지금 슬퍼해도 돌아가진 마.”라고, 미래의 나에게 변호를 건네기 위해.


그러나 사랑이란 논리로 시작하지 않듯, 이별 또한 이유만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결국, 마음이 먼저 기운다. 이유는 그 기운 마음을 따라가는 그림자 같은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조목조목 설명해도 가장 큰 이유는 단 하나다. “이젠, 더 이상 그 마음이 아니다.”


그래서 이별의 순간, 아무리 많은 이유를 적어도 어쩐지 한참을 망설이게 된다. 아마도 그건, 이유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감정이 아직 그 이유들을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이별을 완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후회를 미루기 위해 그 긴 이유들을 적는지도 모른다. 그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겨우 나아간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마지막 창문을 닫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