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주, 사랑하는 것
이번 주.
반갑게도 내 인생의 모토인 '한량' 컨셉을 매우 성실이 수행한 일주일이었다. 와이프는 내게 이미 충분히 한량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말하지만, 내 기준에서 보는 '나'의 한량스러움은 아직 불충분이다. 더 열심히 평온하게 놀아야 한다. 오늘이 가장 젊으니까.
하루 중 가장 사랑하는 시간인 매직아워. 월요일의 매직아워는 골든아워였다. 반짝이는 한강의 잔물결이 청초한 아침의 윤슬과는 다르게 깊은 맛이 있었다. 해가 질 때 달리는 방향이 고민된다면 서쪽이 옳다.
12km를 달리고 집에 왔는데 절친에게 전화가 왔다.
"주말에 산 뛸래?"
잠실에서 시간이 뜨면 요즘엔 교보문고 보다 아크앤북에 가고 있다. 불편한 책 분류가 단점으로 지적되기도 하지만 엉뚱한 동선 덕분에 뜬금없는 책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다른 대형서점의 정돈됨에선 느낄 수 없는 경험이다. 대형서점보다 독립서점을 선호하지만 아크앤북은 인테리어도 좋고 독립서점의 매력이 한 스푼 들어있어 호감이다.
'좋은 사람에게만 좋은 사람이면 돼'
제목만 봤는데도 왠지 위로받는 기분의 책을 발견했다. 당장이라도 읽어보고 싶은 마음과 지금 이 기분을 조금 더 간직하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다 도로 책을 집어넣었다. 다음에 읽자.
의도치 않게 2주 연속 문화생활을 했다. 드라큘라를 봤는데 뮤지컬을 자주 보지 않아 대단한 감상평을 남기긴 어려워 솔직한 한마디로 표현한다.
"진짜 재밌다!!"
스케줄 탓에 혼자 봤는데 유독 기억나는 세 가지가 있다.
'뮤지컬 배우 신성록은 섹시했다.'
'카메라 촬영 금지라고 반복해서 외치던 스텝'들 목 아프겠다. 하지 말라면 안 하면 될 것을 유격조교처럼 잔소리꾼으로 만드는지 알 수가 없다.
'KT는 안 터지나요.' 오페라의 유령 때도 KT는 안 터지던데 샤롯데 관계자님 해결 좀 부탁드려요.
퇴근하는 와이프에게 호출이 왔다. 저번 주부터 굴 타령을 하더니만 도저히 못 참겠는지 단골집으로 튀어 오란다. 추리닝과 잠바를 대충 주워 입고 단골집으로 갔다.
"역시.. 틀림이 없어."
사장님 고향에서 직접 공수하는 석화는 우윳빛을 머금은 실한 속살이며, 너무 빨리 녹아버려 아쉬움까지 들게 만드는 부드러움까지, 완벽 그 자체였다. 올 겨울 들어 다섯 번째지만 질리지가 않는다. 술이 술술 들어가는 게 어떤 건지 궁금한 사람은 이곳의 석화를 맛보면 된다. 대단한 맛을 가진 단골집의 석화는 2월 6일까지만 만나고 잠시만 안녕이다. 연말에 다시 보자.
사업을 막 시작하던 때에 돈을 대하는 마음가짐과 중심을 어떻게 컨트롤해야 하는지 많은 가르침을 주셨던 멘토를 5개월 만에 만났다. 반가웠다. 조금 애매한 시간 탓에 커피와 담소를 가볍게 나누고 미리 예약해 둔 '정면'에 방문했다. 멘토는 홍면을 나는 고기를 추가한 백면을 주문했다.
'정갈하고, 맛있네.'
매장 분위기, 훈훈한 외모만큼 친절한 두 셰프, 깔끔한 국물, 적당히 익은 면, 말아도 국물이 탁해지지 않는 잘 지은 밥. 정말 오래간만에 '맛있는 밥'을 먹었다. 밥을 두 공기나 먹은 건 몇 년만인 것 같다.
다시 카페로 옮겨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몇 달간 살아온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생각보다 치열하게 살아왔는지 우리 이야기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대화 말미에 조금 재미난 계획을 제안드렸는데 벌써부터 다음 달의 만남이 기대된다.
30년 지기 친구, 그의 친형과 셋이서 트레일 러닝을 했다. 트레일 러닝은 비포장길을 뛰는 거다. 러닝은 몇 년 동안 꾸준히 했지만(부상기간 제외) 트레일 러닝은 생에 처음이다. 등산 자체를 선호하지 않기도 하지만 산에서 뛴다는 것이 더욱 엄두가 나지 않았다. 친형 덕분에 트레일 러닝을 시작했다는 친구 이야기가 솔깃해서 다음에 나도 초대해 달라고 했었는데 생각보다 이른 연락이 왔다.
우이령을 뛰는데 초반 경사가 상당해서 근육이 올라올 것 같아 페이스를 조절했다. 걷고 뛰고를 반복하며 조금씩 적응이 되자 석굴암에도 올라갔다. 경치가 정말 좋았다.
'이 맛에 산에 오는 구만.'
산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빙판길과 지나가는 사람들 등산화에 신겨져 있는 아이젠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꿋꿋하게 트레일 러닝화와 두 다리만 믿고 뛰어 올라갔다. 그 순간만큼은 마치 트레일 러닝 n년차가 된 기분이었다.
업힐과 다운힐이 끝나고 반환점을 돌아(반대편 등산 입구) 다시 업힐과 다운힐을 반복해서 스타트 지점으로 돌아왔다. 생각보다 사용하는 근육에 걸리는 부하가 달라서 놀라기도 했고 걱정했던 것보다 일행에 뒤처지지 않은 체력에 뿌듯하기도 했다. 다음에도 같이 뛰기로 약속하고 내 생에 첫 트레일 러닝을 무사히 마무리했다. 기록은 거리 11.27km, 시간 1시간 38분 40초였다.
이번 주는 뭐랄까. 내가 좋아하는 것만 잔뜩 했던 보람찬 한 주였다. 보람참이라는 게 어떨 때는 충실한 경제활동이 되기도 하지만 경험상 마음을 꽉 채우는 것의 본질은 내가 사랑하는(사람, 취미, 공간, 문화생활 따위) 것을 열심히 했을 때였다.
그러면에서 보자면 이번주는 내 삶의 모토인 '충분히 한량스러운 삶'을 충실하게 보낸 일주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