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半)픽션 <슈퍼맨은 없다_우리가 아이를 낳지 않는 진짜 이유>
1. 이름 : F
- 직업 : 기간제 근로자(공공기관 마케팅팀)
- 자녀(연령) : 여아1(8세)
- 주양육자 : 엄마(F)
- 기타 : 지혜의 대학 동창
약속장소는 지혜의 집과 이전 F의 집을 사이에 두고 있는 지하철역 인근 대형카페였다. 딸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이사를 간 F였기에 지혜보다 2~30분 가량 시간을 더 소요해야 했지만, 둘 모두에게 익숙한 곳이니 그 정도쯤이야 기분 좋게 배려해도 될만한 요소였다.
지혜가 선뜻 F에게 먼저 연락한 이유는 각자가 주문한 음료를 미처 픽업도 하기 전에 알 수 있었다. 만나자마자 회사를 그만두었다 고백하는 지혜의 이야기를 들은 F였기 때문이다. 지혜는 좋은 직장에 다녔으며, 일에 자부심도 있었고, 무엇보다 일하지 않는 F를 약간은 한심히 여긴 듯한 과거의 태도였기에 F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혜가 일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랬기에 지혜의 입에서 나온 말들에 F는 놀랍기도, 의외이기도, 한편으로는 약간의 고소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 연락 한 거였구나, 싶기도.
지혜 역시 말하지 않아도 F의 반응을 예상할 수 있었다. 카페에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괜한 약속을 잡았나, 싶은 마음이 들던 터였다. 자신이 내뱉었던 말들과 변하지 않을 것처럼 주장했던 신념들, 그리고 그것들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지금을 깊은 관계의 친구가 아닌 F에게 보여야 할 것이 걱정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 번 입을 열고 나니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었다. 마치 고해성사를 하는 죄인처럼, 지혜가 겪고있는 육아와 관련한 일련의 일들을 모두 겪고 다음 챕터를 향해 나아가는 듯한 F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쏟아부은 것이다. 과정에서 자신의 과거를 가볍게나마 사과하기도 했다. 내가 그때는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라는 둥의 어물쩍 넘어가는 정도였지만.
예전과 다르게 자신을 포장하며 내세우지 않고 보란 듯 들춰내며 이야기하는 지혜를 보자 F의 마음도 조금씩 눅었다. 제 아무리 좋은 회사라도 아이를 키우는 엄마 입장은 거기서도 녹록지 않구나,를 생각하며 지혜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힘들었겠다 말을 얹기도, 나는 그래서 이렇게 했어 라며 조언을 하기도 했다. 조금은 속물스럽게도 상대의 처지가 힘들다하니 과거 그의 행동들이 슬그머니 용서가 되는 것이었다.
이런저런 말들이 오가던 중 지혜는 겨우 몇 모금만에 다 마셔버려 채 녹지 않은 얼음과 미량의 커피흔적만 남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달그락 소리 내 홀짝이며 말했다.
"그게 문젠거 같다. 아이를 잘 돌보고 싶은 마음이랑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양립하는 게. 당연한 마음이겠지만, 현재로서는 일을 하게 되면 아이를 잘 못 보게 될 것 같으니까. 당장에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점심 먹고 바로 하교시간이라며. 그래가지고는 어떻게 일을 하면서 주형이를 볼 수 있을란가... 그래가 이도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타지에서 만난 고향친구를 앞에 두고 수 년간 익혀둔 표준어를 써야 할지, 고향 사투리를 써야 할지 애매한 말투로 지혜가 말하자 F 역시 표준어 억양에 사투리단어들을 어설프게 끼워가며 대답했다.
"맞다. 지금으로서는 애를 키우려면 둘 중에 하나는 어느정도 포기하는게 맞긴 하지. 일을 하면서 아를 완전히 케어하겠다는 생각을 가지면 욕심이고, 반면에 아를 완전히 케어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은 억수로 드물테니까. 나아지고 있다고는 해도 아빠는 걱정하지 않을 부분을 엄마는 걱정해야 하는 게 아직까지의 현실이잖아. 나도 사실 아직 불안하긴 해. 이게 맞겠지 싶을때가 간혹 있기도 하고. 정규직도 아니고 계약직이니까 2년 후엔 또 어떻게 될지도 모를 일이고."
지혜의 속 깊은 고민에 F 역시 남편에게도 말 못 했던 고민들이 술술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대학 졸업 이후 꽤 긴 시간 다른 삶을 살아온 그들이 결국은 같은 고민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씁쓸하기도 했다.
대화를 나누던 지혜의 머릿속에 지난날의 대조적인 두 개의 장면이 선연히 떠올랐다.
첫 번째는 일을 하던 시절의 그때.
평소보다 두어시간 이른 퇴근길에 해는 아직 저물기 훨씬 전으로, 따스한 햇살과 광명이 평소보다 지혜를 들뜨게 한 봄날의 오후였다. 주형을 빨리 하원시키며 오랜만에 단지 내 놀이터에 들러 그네도 밀어주고 시소도 태워줘야지,라는 야무진 계획도 머릿속에 세웠다. 그러다 길을 건너기 위해 신호를 기다리던 중, 갓 초등학교를 입학했을 정도로 보이는 앳된 남자아이와 그의 엄마로 추정되는 여성이 나란히 각자의 자전거를 타고 어깨에 가방을 둘러맨 채 얼굴엔 환한 미소를 띠고 길을 건너고 있는 모습을 본 것이다. 온 세상의 따스함을 담뿍 받고 있는 듯한 두 모자의 모습에 지혜는 부러운 마음을 넘어 왜인지 모르게 두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이었다. 어둑해지는 오후 여섯 시가 넘어까지 햇볕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아파트 1층의 어느 방 한켠에서 엄마를 기다릴 주형에게 미안해져서인지, 아무리 노력해도 하루가 다르게 회사에서는 애물단지 취급을 받고 있는 제 자신이 처량해서인지 이유는 알 길이 없었다.
두 번째는 불과 열흘 정도 전의 그때.
지혜가 그렇게 바랐던 평화로운 어느 오후, 놀이터에서 주형의 느지막한 마지막 바깥놀이를 지켜보고 있을 즈음이었다. 저녁반찬은 무얼 할까 고민하며 등을 밀어 그네를 태워주던 주형의 옆 그네에는 주형 또래의 여자아이가 할머니로 추정되는 이의 도움을 받으며 주형과 나란히 번갈아 오르락내리락거리던 중이었다. 엄마는 언제 와?, 곧 올 거야,라는 등의 대화를 설핏 엿들으며 겁 많은 주형을 위해 힘 조절 중이던 때였다. 조용히 그네를 타던 여자아이가 돌연 엄마!라는 외침과 함께 그네에서 폴짝 뛰어내리며 앞을 향해 내달렸다. 자연히 여자아이가 달려간 쪽을 바라본 지혜의 눈에는 말끔한 정장차림의 지혜 또래 여성이 왼손에는 서류가방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저에게 다가온 아이를 한 팔로 감싸며 따뜻한 호빵처럼 볼록 부풀어 오른 아이의 볼에 입맞춤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지혜는 불과 몇 년 사이 바뀌어진 입장의 전혀 상반된 장면에 또 한 번 부러운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욕심이 많은 걸까. 가진 것에 만족해야 하는데, 꼭 남들을 더 부러워하는 내가 문제인 것 같기도 하고..."
대조적인 두 장면에서 느낀 모순된 감정들을 이야기하며 지혜는 괜스레 창피해진 기분에 혼잣말인지 F에게 묻는 말인지 모르게 중얼거렸다. F는 고개 저으며 말했다.
"아니, 나도 똑같다. 니만 그런 거 아니다. 그렇게 힘들게 재취업해 놓고, 가끔 환희가 어디 아프다고 하면 정신 없어지면서 집에서 같이 있었던 때가 그립고 그래. 크면서 말투도 새침해지고 버릇없어지는데 이게 내가 일을 시작해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다 내 탓인 것 같고. 그래도 어쩌겠어, 내가 선택했는데. 너무 내 탓으로 생각 안 하고 깊게 고민 안 하려고."
지혜는 F의 고백에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일을 다시 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걱정들을 하는구나, 나만의 고민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에 위안이 되는 것이었다. F는 그런 지혜를 보며 말을 이었다.
"보통 사람들이 대립적인 의미로 워킹맘이다 전업맘이다 카면서 이분법적으로 편 가르기를 하기도 하잖아. 근데 내가 둘 다 겪어보니까 그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는 서로를 부러워하는 것 같거든. 각자가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포기해야 할 부분들을 가졌으니까. 물론 자신의 선택을 완전히 만족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분명 있겠지만. 어쨌든, 결국 '엄마'의 호칭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들의 어려운 숙제잖아. 일 하면서도 내 애를 충분히 케어할 수 있는 날이 언젠가는 올란가. 죄책감 없이 마음 편하게 일 할 수 있는 날이."
지혜는 말없이 고개 끄덕이며 동의했다.
잠깐의 침묵 뒤 지혜는 아직 차(茶)가 반 넘게 남은 F의 찻잔을 보고서 자신은 커피 한 잔만 더 마시겠다며 이전 것과 똑같은 음료를 다시 주문하고 돌아와 앉으며 물었다.
"환희는 학교 잘 다녀?"
F는 미소 지으며 고개 끄덕여 답했다. 사실 들쑥날쑥한 딸 환희의 기분에 요즘 F는 조금 고민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까지는 지혜에게 말하지 않기로 한다.
"초등학교는 하원이 빠르다며. 돌봄이랑 방과 후 그런 거 하는 거야?"
요즘 최대 걱정거리인 딸의 초등학교 생활에 대한 지혜의 물음에 F는 응, 그렇지, 돌봄이랑 방과후랑 학원 맞춰 보내고 있어, 라며 대충 얼버무려 대답했다. 괜찮아지겠지 애써 덮어놓았던 걱정이 입 밖으로 꺼내는 동시에 눈덩이처럼 부풀어질 것 같았고, 아직 초등자녀를 키우고 있지 않은 지혜에게 이야기를 꺼내보았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는 판단에서였다.
"결국 학원 스케줄 맞춰서 뺑뺑이를 돌려야 하는 거잖아, 참 애들이 안쓰럽기도 하고."
예상대로였다. 알맹이 없는 듯한 지혜의 겉치레뿐인 걱정 아닌 걱정에 F는 다시금 마음이 닫혔다. 진실되지 않은 걱정은 무관심보다도 더 불편한 것이었다.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과 마음의 벽을 만드는 것은 내가 상대와 어떤 위치에 서 있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아까의 지혜는 F와 같은 위치에 서서 말했었다면, 지금의 지혜는 반대편에서 말하고 있었다. 또다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불편해질 것 같은 대화에 F는 약간의 미소만 지으며 왼쪽 손목에 채워진 스마트워치를 바라보았다. 만난지 2시간 정도가 지난 후였다. 이 정도면 됐다 싶은 시간이다. 만약 다시 지혜에게 연락이 온다면 연락을 받을 것인가, 속으로 가늠해 보는 F였다.
지혜 역시 F의 불편한 표정을 본 뒤 자신이 뱉은 말을 약간 후회했다. 조심한다고 했지만 저도 모르는 새에 튀어나와 버린 말들. 하지만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아직 F에게 더 묻고 싶은 것이 남은 지혜는 시계를 보는 F를 더 붙잡아두고싶었다. 마음이 급해진 지혜는 궁금했지만 배가 아플까 고민하던 질문을 꺼냈다.
"이사는, 어디로 한 거야? 환희 초등학교 때문에 한 거야?"
F는 꽤 오래전 온기가 식었을 듯한 머그잔을 양손으로 감싸 쥐며 대답했다.
"응, ㅂ구로 이사했어."
역시. 지혜는 어느 정도 예상한 지역의 언급에 배가 조금 아파왔다. 지혜의 동네에서 보통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서 이사를 하는 곳은 ㅂ구가 대다수였다. 신도시였던 지혜의 동네에서는 아직 '학군'이란 것이 제대로 형성되어있지 않아 초등학교 입학을 기점으로 많은 이들이 이사를 선택했던 것이다. ㅂ구는 서울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소위 보다 더 '학군지'인 곳을 찾는 이들이 선택하는 곳이었다. 지혜 역시 최근 주형의 유치원 엄마들과의 대화를 통해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몰랐다면 몰랐을 일이지만, 알고 나니 이야기는 달라졌다.
지혜는 F를 좀 더 붙잡아 두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