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半)픽션 <슈퍼맨은 없다_우리가 아이를 낳지 않는 진짜 이유>
1. 이름 : F
- 직업 : 기간제 근로자(공공기관 마케팅팀)
- 자녀(연령) : 여아1(8세)
- 주양육자 : 엄마(F)
- 기타 : 지혜의 대학 동창
그게 어디 있었더라, 도통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오랜만에 찾으려니 잘 기억이 나지 않는 F였다. 티비장 서랍을 열어보고, 주방 수납장을 뒤져보아도 없어 그냥 불편하더라도 핸드폰을 이용할까 포기하려던 차 현관 신발장에서 발견했다. 이게 왜 여깄어.
F는 식탁 위에 메모장과 어렵사리 찾은 계산기를 나란히 놓아서야 본격적으로 자리 잡고 앉았다. 왜 샀는지 기억나질 않고 쓴 지도 오래되어 먼지가 얕게 쌓인 그것을 물티슈로 대충 쓱 닦고 전원을 켜 메모장에 써두었던 아파트 가격을 입력해 보았다. 거기에 대충 예상되는 지금 집의 매도가를 빼 나오는 부족한 예산에 한 번 놀라고, 대출이자율을 곱해 나오는 이자금액에 한 번 더 놀랐다. 이게 맞나, 이 금액을 감당하고 이사를 하는 게 맞나. 아, 부동산 중개수수료에 세금도 있었지.
심란해진 마음에 기분전환 위해 장도 볼 겸 집을 벗어나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는 F였다. 지은 지 10년 되지 않은 F의 아파트 엘리베이터는 아직 새것 같았다. 사람의 옷이 시대의 유행을 타듯 아파트 디자인 역시 그 시대의 무언가를 따르는 듯했는데 F의 아파트는 다행히 '모던'이 유행하던 시기 지어져 그런지 시간이 조금 지났어도 세련된 느낌이었다. 자연히 지난 주말의 임장이 떠올랐다.
유행이고 뭐고의 의미 없이 그저 오래되었던 그 집들.
충격의 첫 아파트를 둘러본 후 건너 아파트 두 어개를 좀 더 둘러보았지만 처음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컨디션이었다. 페인트칠로 세월을 덮어놓은 깨끗한 외벽, 그와 극명히 대조되는 낡은 공용공간, 인테리어 유무에 따라 천지차이를 보여주는 집 안 상태, 답 없어 보이는듯 한 빽빽한 지상주차장.
수 억을 은행에서 빌리고 한 달 몇 백을 대출상환에 쓰는 게 맞을지 의구심이 들었다. 이 깨끗한 아파트를 팔고 그 오래된 곳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렇게 큰돈을 더 써야 하는 게 맞나 싶은 것이었다. 오늘따라 유독 F의 아파트는 더욱이 새 것 같아 보였다.
마트로 가기 위해서는 큰 길을 건너야 했기에 F는 왕복 8차선 도로의 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선다. 평소에는 눈 담아두지 않았던 큰길에 위치한 상가를 왼쪽부터 차례로 훑어본다. 2층부터 7층까지 각종 병원으로 가득 찬 건물을 보고 있자니 같은 건물 1층에 위치한 약국이 부러워졌다. 아니다, 건물주를 부러워해야겠구나.
곧이어 옆건물로 시선을 돌리니 이번엔 저런 것도 가르치나,라는 생각이 들게끔 다종다양한 학원들이 즐비해있다. 전통의 영어학원, 수학학원, 입시학원부터 댄스학원, 보컬학원, 코딩학원까지. 우쿠렐레 학원도 있네.
수많은 학원들을 보고 있자니 '학군'이란 게 뭔지 문득 근원적으로 궁금해졌다. 지난 주말 다녀온 그 '학군의 동네'도 저렇게 학원들이 많았던 듯하다. 같아 보이는 듯 해도 다른 거겠지, 그러니까 몇 억을 더 주고서라도 가는 거겠지. 복잡해진 마음을 다스리려 나왔지만 머리는 아직 비워질 생각이 없는 듯 하다.
치솟는 물가에 평소보다 많은 것을 담지 못한 장바구니를 어깨에 메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자니 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많은 아이들이 왁자지껄 쏟아져 나오고 있다. 오전 내내 붙어 있었음에도 아직 할 이야기가 많이 남았는지 아이들은 제각각 소리 높여 상대를 향해 웃으며 대화하고 있다. 보는 이마저 즐겁게 만드는 싱그러움이다. 샛노란 학원 버스에 곧장 올라타는 아이, 친구와 손잡고 아파트 단지로 걸어 들어가는 아이, F가 방금 전 보았던 큰 도로변의 학원가로 씩씩하게 걸어가는 아이. 이미 익숙한 행선지를 향해 각자의 길로 가는 아이들의 얼굴은 빛나고 있다.
F는 자연히 딸 환희가 떠올랐다. 이제 곧 초등학생이 될 환희. 저 학교에서 저 언니, 오빠들과 같은 얼굴로 생활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아니, 충분히 행복할 것 같다. 그렇게 되면 옆께에 위치한 중학교, 고등학교에 자연히 진학하겠지. 욕심내지 않는다면 그걸로도 괜찮을 듯하다. 한 달에 몇 백을 대출상환으로 은행에 납부하지 않아도 된다. 마음이 편해진다. 울렁거렸던 속이 한순간 시원해진 기분이다.
이사를 가지 않는다는 쪽으로 마음을 기울이고 나니 그 많던 고민들이 없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어차피 가지지 못할 물건이었음을 인지하니 더 이상 욕심나지 않았다. 조촐하게 사온 재료들로 편안한 마음에 저녁을 차리자니 콧노래마저 튀어나왔다. 엄마 좋은 일 있어?라고 묻는 딸 환희에게 세상 인자한 미소로 답했다.
마음의 평화는 퇴근한 남편의 한마디에 금세 깨져버렸다.
"정운이네도 결국 이사 간다네."
환희의 친구 정운은 아빠들이 같은 회사를 다녀 서로 아는 사이였다. 같은 유치원에, 아빠들의 인연도 있어 친구들 중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서울로 갈까 고민한다더니, 진짜 간대?라는 F의 물음에 남편이 이유 모를 한숨 쉬며 대답했다.
"어, 그렇대."
하루 반나절 넘게 걸려 다잡아놓았던 마음이 1초 안되는 시간에 흔들림을 F는 깨달았다. 남편은 우리는 어떡하지?라고 F에게 물어보았지만 F 역시 쉽사리 답할 수 없었다. 속이 다시금 울렁거렸다.
"여기서 사는 것도 그렇게 나쁘진 않잖아?"
본인을 다스렸던 말을 남편에게 던져보는 F였다. 남편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렇긴 하지. 근데 결국 이사 가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지 않을까?”
역시 아직 이사를 하는 쪽으로 마음이 쏠린 듯한 남편이었다. 정운이네의 소식이 그를 더욱 부추겼겠지. 지금의 나처럼.
"근데 내가 아까 계산을 해봤는데, 어딨더라. 여깄다. 이거 봐봐 이만큼 대출하고, 한 달에 이만큼씩을 내야 돼."
이번엔 현실문제를 무기로 꺼냈다. 오전에 적어두었던 메모장을 찾아 남편의 코앞에 들이밀고 숫자를 보여주었다. 그 정도는 괜찮아,라는 답변을 듣고 싶은 마음도 없진 않았다. 그렇게나 내야 된다고? 라며 겁을 먹고 포기한대도 괜찮았다. 어떤 쪽이든 속절없이 흔들리는 마음을 남편과 다잡고 싶었다. 그는 어떤 답을 할까 싶던 F에게 다시금 부동산이론을 들이미는 남편이었다.
"대출을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 여보, 지금 우리 적금 붓는 거 이율이 얼마야? 겨우? 그럼 우리 여기 집 사고 오른 건 수익이 얼마야? 그걸 연 이율로 환산해 봐. 이봐, 도저히 비교가 안 돼. 대출을 대출로 보면 안돼. 이건 투자야."
대출이 대출이지, 대출로 보지 말라니. 남편은 뭐가 씌어도 단단히 씌인 모양이었다. 의뭉스런 F의 눈빛을 눈치챘는지 남편은 환희카드를 커냈다.
"여보, 그리고 학군이 달라도 다르다니까. 환희가 좋은 환경에서 좋은 친구들이랑 공부하면 좋지. 그리고 그 정도 대출이야 요즘세상에 집 사면서 부담 못 할 정도는 아니야."
아직도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는 F의 표정을 살피곤 남편은 마지막 펀치를 날렸다.
"맹모삼천지교, 몰라? 맹자 엄마는 맹자를 위해 3번이나 이사를 했다잖아. 딸이라고는 환희 하나뿐인데 우리가 그거 하나 못해 줘?"
맹모삼천지교. 공동묘지 근처에 살았던 맹자가 장례 흉내를 내자 그의 엄마는 시장으로 이사했고, 시장으로 이사하자 장사치 흉내를 내는 아들을 보고는 다시 서당으로 이사해 그 이후에는 글을 읽히며 잘 살았더래요, 하는 그 이야기를 왜 모르겠는가.
그럼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이 공동묘지고, 시장이며 학군지는 서당인가. 집은 우리 집이 더 깨끗한데, 주차는 우리 아파트가 훨씬 편한데. 하물며 공동묘지면 어떻고 시장이면 어떻길래. 요즘 세상에 수도권에 집 한 채 있으면 잘 살고 있는 거 아닌가. 딸 환희가 없었다면 이런 고민을 했을까. 아이가 있어 응당 그래야한다면 어디 집값 무서워 아이를 낳을까. 맹자 엄마도 우리나라 부동산 시장에서는 서당으로 이사를 못했을 것 같은데.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많은 곳이라 한들 내 딸에게도 해당될지 의문이다. 말이 빨리 트여서 영재 아닌가 싶던 시기도 있었지만, 이젠 그저 평범한 아이임을 너무도 잘 안다. '학군이란게 다르긴 달라'라는 실체 없는 말만 믿고 수 억을 대출하는 게 옳은 것일지.
하지만 F는 마음속의 그 모든 말들을 남편의 반짝 빛나는 눈을 보며 목 안으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회사도 좀 더 가깝고, 환희 중고등학교 생각해서, 겸사겸사 옮겼어."
수많은 고민의 밤들을 지혜 앞에서는 한마디로 일축하는 F였다. 학군 얘기며 이사 간 친구한테 자극받은 얘기 등은 굳이 하고 싶지 않았다. 속물처럼 보일 자신도, 저처럼 자극받을 지혜의 입장을 위해서도.
"정말? 그래도, 거기 집값 꽤 비싸지 않아?"
대충 얼버무리려 했지만 더 파고드는 지혜였다. 난감했다. 별로 부담스럽지 않았다는 거짓말도, 무리해서 이사하는 바람에 대출의 무게가 하루하루 느껴진다는 우는 소리도 하기 싫었다. 그만큼 우리가 각별하진 않잖아, 오늘 이후로 다시 볼 일이 없을 것도 같고. 이럴 땐 그냥 미소로 답하는 게 제일이었다. 그 정도의 눈치가 없진 않은 지혜는 이내 상대의 불편을 파악하고 입을 슬며시 다물었다.
사실 아직 이사가 잘 한 결정인지 F는 확신하지 못한다. 동네 애들이 좀 더 유순한 거 같지 않아?라는 느낌적인 느낌의 남편의 감상은 딱히 공감되지 않았다. 애들은 애들인걸. 다 각자의 개성이 있지 동네에 따라 더 유순한 건 뭐람. F는 학군이라는 실체가 역시 아직 실감 나진 않는다. 아니, 실감 날 때가 오긴 올까.
결국 남은 건 대출이었다. F는 더 비싼 집을 사고 더 가난해졌는지도 모른다. 다시 일을 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됐고, 외벌이에서 맞벌이가 됐음에도 씀씀이는 더 줄여야 했다. 무거운 대출의 무게에 F가 집을 소유한 건지 집이 F를 소유한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F는 인터넷을 켜 동네 맘카페에 최신글로 올라온 '학업성취도 평가'기사를 클릭한다. 동네에서의 실거주가 확인되어야 카페가입을 승인시켜 주어 증빙서류로 주민등록등본을 제출해야 했던 까다로운 카페였다.
상위학교 리스트에서 이사 온 동네의 중, 고등학교를 찾았다. 입가에 미소가 띤다. 혹시나 하여 이사 오기 전의 학교들을 찾아보지만 리스트에는 없다.
F는 좀 더 큰 웃음을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