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半)픽션 <슈퍼맨은 없다_우리가 아이를 낳지 않는 진짜 이유>
1. 이름 : 김지민
- 직업 : 게임회사 일러스트레이터
- 자녀(연령) : 없음, 미혼
- 기타 : 지혜의 동생
야근과 특근을 밥먹듯이 한 3개월간의 프로젝트가 마무리 되고 오랜만의 늦잠을 청하려던 지민이었다. 작정하고 늦잠을 자자는 생각에 알람도 맞추지 않고 잠들었지만 오전 7시가 되자 눈은 절로 뜨였다. 죽어라 알람이 울려도 피곤해서 깨어지지 않던 날들이었는데, 어째서 맘먹고 늦잠을 자려할땐 눈이 번쩍 뜨이는 것인지. 눈치없는 자신의 신체리듬을 원망할 수 밖에 없는 지민이었다.
도저히 다시 잠이 오질 않아 누운자리 그대로 핸드폰을 켜 sns를 확인하고 내가 잠들었던 사이 업데이트 된 세상의 재미난 소식이 없나 연예뉴스를 뒤적이던 때였다.
-짐, 오늘 우리집에 와줄 수 있어? 이번 주 금요일까지 휴가 냈다고 했지?
지민을 '짐'으로 줄여부르는 발신자는 ‘졔’. 지민의 친언니 지혜였다. 귀신같이 내 휴가를 기억해서는 휴가 첫날 자기 집에 와달라고? 말이 되는 소릴. 지민은 화면 상단에 뜬 메시지 팝업을 손가락으로 밀어올리고 다시 연예기사에 집중했다. 대부분 어제 저녁 방영된 예능프로의 감상문 비슷한 것들이거나 유명 연예인의 sns 소식을 그대로 퍼날라 기사화 한 것들이었다. 요즘 기자 아무나하네, 라는 비난섞인 생각을 할때쯤 다시 "졔"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일어나자마자 허리가 좀 이상해서ㅜㅜ 주형이 등원이랑 하원만 좀 도와주면 될 것 같은데. 부탁할게 ㅜ
지민은 '병'을 앞세우는 언니를 무시할 순 없어 이번엔 메시지 팝업을 올려 없애는 대신 손가락으로 꾹 눌러 채팅창에 입장해 답변을 보냈다.
-형부는?
언니는 눈물을 왕창 흘려대는 이모티콘과 같이 대답했다.
-어제부터 내일까지 출장 ㅜ 오늘 잠깐 병원 다녀와서 침 맞으면 내일은 괜찮을 거 같은데, 어떻게 안 될까? 점심이랑 저녁 맛있는걸로 챙겨줄게, 응?
지민은 밥상을 걷어차는 이모티콘을 보내고서는 침대에서 일어나 이불을 정리했다. 지혜에겐 '고마워'라는 답장이 와 있었다.
3살 터울의 지혜와 지민은 여느 자매와 마찬가지로 서로의 머리를 쥐어뜯은 유아기를 지나고 각자의 존재를 외면했던 청소년기를 보낸 후 세월의 풍파와 가족 외 믿을 사람 없는 험한 세상을 경험한 현재는 그 어떤 때보다 끈끈한 자매애를 자랑하고 있었다. 모순적이게도 각박한 이 세상이 죽어있던 자매애를 싹틔워준 것이다.
성인이 되어 낯선 땅에 입성한 지민에게 언니는 등대같은 존재였다. 서울이라는 별천지에서 자리잡고 사회생활을 먼저 시작한 언니는 지민에게 가끔 맛있는 음식과 비싼 옷들을 사주었고, 지민은 그런 언니가 무척이나 멋진 신여성처럼 보였다. 지민의 멘토였고 본보기였으며, 길잡이였다.
적어도 결혼을 하고 조카 주형을 낳기 전까지는 그랬다.
주형을 낳고 난 언니는 마치 다른사람이 된 듯 했다. 아기를 낳은 저만 세상의 모든 짐을 진듯 했고, 자기연민에 우울증에 각종 시름을 혼자 다 껴안은 듯 했다. 그 명목으로 고향에 있는 엄마 아빠를 작은 조카 하나 돌보기 위해 연고 없는 곳으로 불러들이더니 이용가치를 다 빼먹고 나서는 다시 돌려보내기까지 했다. 적어도 지민이 보기엔 그랬다.
그렇게 부모님을 괴롭혔으면 일이라도 끝까지 할 것이지, 1년 전 일을 그만둔다는 언니를 보고 지민은 다시 생각해보라며 거푸 그를 뜯어말렸었다. 다친 허리는 병가를 내고 돌보면 되지 않냐며, 이대로 일을 그만두면 지금까지 쌓아올린 건 어쩔거냐며, 이럴려고 엄마 아빠를 불렀던 거냐며. 하지만 지혜는 그런 지민에게 이제 한계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결국 그의 뜻대로 모든 것을 포기했다.
'딩동-'
지척에 살고있어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들르는 언니의 집이지만, 서로의 선은 정확히 지키는 사이인지라 현관문 비밀번호는 몰라 벨을 눌렀다. 허리가 아파 문도 제대로 열어줄수 없으려나, 걱정하던 찰나 문이 열렸다.
"이모!!!"
주형이었다. 지민의 유일한 조카인 주형은 언제봐도 사랑스러웠다. 조카사랑이 남다른 지민은 주형에게만큼은 언제나 열린마음, 열린지갑이었다. 피곤에 솟구쳤었던 짜증이 밝디 밝은 주형을 보자마자 사르르 사그라들었다.
"짐! 나 여깄어, 안방!"
언니의 목소리에 주형의 손을 잡고 안방으로 가니 지혜는 어정쩡한 자세로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참, 별의 별 꼴을 다보네 싶었다. 지혜도 그런 자신이 민망했던지 얼른 지민을 향해 해야할 일들을 일렀다.
"10분 뒤에 유치원 셔틀 오니까 정문으로 가서 주형이 셔틀만 태워주면 돼. 다녀와서 나 일어나는것만 도와주면 금방 한의원 다녀올게. 청소는 안 해도 돼. 다녀와서 내가 할게."
전혀 안 괜찮아 보이는 언니를 향해 진짜 괜찮아? 라고 물었지만 지혜는 고개만 끄덕였다. 목 늘어난 티셔츠에 눈에 띄게 커진 모공, 정수리 위 새치가 희끄무레하게 올라온 언니는 주형을 낳기 전보다 10년은 더 넘게 늙은 것 같았다. 출산은 노화의 지름길이라더니, 두 눈으로 그 사실을 확인하는 지민이었다.
언니의 요청사항을 모두 처리한 뒤, 굳이 혼자서 병원을 가겠다는 언니를 보내고 지민은 주인없는 집에 홀로 덩그러니 남겨졌다. 신혼집 집들이를 왔을 때만 해도 부러움 그 자체였던 집은 예전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으리만치 엉망진창이었다. 청소는 할 필요 없다 이른 언니였지만, 너저분한 집에서는 엉덩이 한 짝도 마음놓고 앉을 수 없는 다소 까탈스런 성정의 지민이었기에 소매를 걷어부치고 눈에 보이는 것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어지러운 짐의 주범은 주형의 것이었고, 새삼 사랑스러운 조카의 존재가 성가시게 느껴졌다.
큰 짐들만 정리했음에도 꽤 오랜 시간이 흘러있었다. 소파에 힘없이 털썩 앉아 익숙한듯 티비를 켜 넷플릭스로 접속했다. 이제야 휴가같은 휴가구나, 느끼며 소파 팔걸이에 비스듬히 상체를 기대 뉘이고 인기콘텐츠 중 하나를 골라 시청하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 일어나 바쁘게 움직여서 그런가, 눈꺼풀이 점차로 무거워져갔다.
'삐비비빅-'
현관문 비번을 누르는 소리에 퍼뜩 잠을 깨는 지민이었다. 잠이 들었었나, 시계를 보니 1시간은 너끈히 잔 듯 했다. 티비에선 시청중이던 예능 1화가 종료되고 자동으로 2화가 연속재생되고 있었다.
"김지민-! 쉬고 있었어? 뭐 보고 있었어? 넷플? 그러고보니 넷플 안 본지도 꽤 됐네."
아픈 허리로 뭘 그리 바리바리 사들고 왔는지, 지민은 양 손 비닐봉지를 식탁위에 내려놓는 언니를 보며 말했다.
"허리도 아프면서 뭘 그렇게 사왔어? 넷플을 왜 안봐? 주형이 없을 때 보면 되잖아."
소파를 벗어나며 언니가 사온 짐들을 눈으로 훑었다. 평소 그녀의 동네에 올 때 항상 먹던 지민이 좋아하는 가게의 떡볶이, 순대, 튀김 세트였다. 고소하고 매콤한 냄새에 갑자기 허기가 느껴졌다. 그러고보니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도 둘은 2인 1조가 되어 식탁을 세팅했다. 지민은 음식을 담을 그릇과 앞접시, 수저를 챙겨 두 개의 자리에 세팅했고, 그 사이 지혜는 나머지 장거리들을 냉장고에 정리하며 음료를 내놓았다. 몸을 분주히 움직이면서도 입은 쉬지 않았다.
"주형이 재울 때 항상 같이 잠든단 말이야. 주형이 유치원 갔을때는 반찬하고 청소하고 하면 또 시간이 금방 가. 볼 시간이 어딨어."
언니의 푸념 섞인 대답에 지민은 한발짝 더 거리감을 느꼈다. 언니는 더이상 지민이 알던 별천지의 선구자가 아니었다. 인간 '김지혜'라기 보다 그저 '주형의 엄마'가 되어가고 있었다.
낯선 거리감에도 언니가 상처받을까 굳이 그러한 말을 입 밖으로는 꺼내지 않는 지민이었다. 하지만 지혜는 그렇지 않았다. 부드러운 떡볶이를 두개 집어 한입가득 넣고선 역시 떡볶이는 밀떡이야, 라며 저만의 행복감에 도취된 지민에게 지혜는 눈치없는 질문을 던졌다.
"만나는 사람은 없어?"
목구멍으로 넘어가려던 찰나의 떡이 도로 입가로 튀어나올 뻔 했다. 지민은 복숭아음료로 목을 달래고선 언니를 조금 노려보며 대답했다.
"만나는 사람은 무슨. 요즘은 연애 생각도 없어. 나 하나 건사하기도 바쁜데 뭐. 그냥 이대로가 좋아."
없는 소리가 아니었다. 지민은 실제로 마지막 연애 후 5년 가량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해 본 적이 없었지만, 전혀 아쉽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러한 느낌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물론 현실적인 이유도 배제할 순 없었다. 나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다는 건 우는 소리가 아닌 진심이었다.
"친구들은 다 결혼하지 않았어? 엄마 아빠가 너 걱정 많이 하더라, 지금은 좋다고 느껴도 나중에 나이들면 또 달라."
오늘따라 왜이럴까 싶게 지혜는 지민의 속을 긁고 있었다. 자신은 언니를 위해 언니가 지금 불행해 보인다, 꼴을 봐라, 애만 키우지 말고 거울을 보는게 어떻겠냐, 말하고 싶은걸 꾹꾹 참고 있는데. 그리고 엄마 아빠가 걱정하는건 내가 아니라 언니라고.
"안 한 친구들도 있어. 엄마도 이젠 거의 포기 했던데. 혼자 살아도 괜찮을 것 같대. 언니 고생하는거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더래."
화를 꾹꾹 참아가며 대답하는 지민이었지만, 종국엔 약간의 진심을 드러냈다. 그를 놓칠 지혜가 아니었다.
"나 고생하는거? 내가 무슨 고생을 하는데? 말이 좀 이상하다?"
지민은 아차 싶었지만, 이왕 이렇게 된 마당에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휴가날 아침부터 조카케어를 위해 달려온 저였다.
"언니가 먼저 시작했잖아. 솔직히, 언니 결혼생활 보면 결혼하기가 더 싫어진다고. 언니랑 형부 보면 결혼장려가 아니라 비혼장려야. 내가 결혼하기 싫어진건, 팔할이 언니 탓인거 같은데."
아직 뜨끈한 떡튀순을 가운데 두고서 근 이십여년만의 자매전쟁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