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쩌다 축구를 시작하게 되었나.
Tinder에서 만나 결혼을 약속한 커플로, 태국으로 이민을 계획 중입니다.
함께 글을 쓰면서 번갈아 가며 올리고 있습니다. 제목의 [윤]은 윤호의 글, [보]는 보람의 글입니다.
지난 글의 윤호의 말처럼 나는 자타공인 프로 운동 은퇴러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운동하기 좋은 날이었다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어제 한 운동 탓에 근육통에 시달려서, 지난주에 주문한 트레이닝복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서, 어제 먹은 삼겹살이 소화가 잘 되지 않아서, 내일의 출장을 위해 오늘은 에너지를 비축해야 하므로... 등등의 다양한 이유로 내게는 대부분의 날이 운동하기에 적당하지 않은 날들이었다.
이러한 나의 행보를 꾸준히 지켜봐 온 사람으로서는 선뜻 믿기지 않겠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운동을 아주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초등학교를 거쳐 중학교,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최애 예체능 과목은 단연 체육이었다. (예체능으로만 한정하지 않더라도 아마 최애였던 듯싶다) 다만 모든 체육 과목을 다 좋아하거나 잘한 건 아니었는데 주로 성적(수행평가)에 들어가지 않는 체육 활동들에 소질이 있었다. 예를 들어, 오래 달리기나 오래 매달리기, 유연성 테스트와 같은 항목에서는 언제나 최하위권이었다. 유연성 테스트의 경우 평소 운동을 잘하는 이미지 때문인지 내 기록을 본 체육 선생님께서 넌 그래도 최소 기구에 손이 닿아 측정은 되어야 하지 않겠냐며 테스트에 좀 더 성의 있게 임하라고 하셨는데, 사실 나는 이미 운동장 한쪽에서 친구를 내 등 위에 태워 가며 내가 가진 최대치의 유연성으로 시험에 임한 상태였던 터라 그 당시 당황스럽고 민망한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반면에 성적과의 연관성이 떨어질수록 나의 체육 능력은 더욱 빛을 발했다. 피구 같은 경우에는 ‘우리 팀의 공은 모두 보람이에게로’라는 무언의 약속 같은 게 있었음이 분명했고, 반 대항 피구대회를 한 어떤 날은 다른 반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와 “6반에 그 공 두 손으로 던지는 애가 누구야?”(나는 당시 두 손을 머리 위로 쳐들어 무릎과 발목 사이에 공을 내리꽂는 형식의 투구 폼을 가졌었다) 하며 나의 정체를 확인하러 온 경우도 있었다. 발야구 역시 투수와 4번 타자를 겸업했고, 중학교 시절에는 공 멀리 던지기 수행평가에 임하는 내 모습을 본 육상부 선생님께 ‘자네, 공을 던지는 폼이 예사롭지 않은데 혹시 투포환을 해보지 않겠나.’ 하며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과거의 영광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20대 이후의 나는 항상 모든 운동을 간만 보다가 채 석 달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는 프로 운동 은퇴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게 숱한 운동들을 시도하고 실패하기를 반복하던 어느 날. 문득 생각했다. 운동을 위한 운동, 다이어트를 위한 운동이 아니라면 어떨까? 학창 시절에 했던 피구나 발야구처럼 재밌고 지루하게 반복되지 않으며 나의 승부욕까지 자극할 수 있다면?
그런 생각으로 주짓수 도장에 등록했지만, 이전과 다르지 않은 행보를 보이며 또 하나의 운동 은퇴를 앞둔 어느 날, 글쓰기 수업에서 선생님께 책 한 권을 추천받았다. 이름하여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 공 한 번 차본 적 없던 여성 작가가 여자 축구단에 가입하고 운동을 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는데, 그 책을 읽다 보니 축구라면 그간의 다른 운동들과 다르게 진짜 재미를 붙여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이 워낙 재밌어서 윤호에게도 빌려줬었는데, 축구에 흥미를 갖는 내 반응을 보더니 당장 여자축구팀 하나를 알아 왔고, 바로 다음날부터 그 축구팀에 나가게 되었다.
생긴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다는 팀의 첫인상은 생각보다 강렬했다. 나를 비롯 축구팀의 90% 이상이 발야구를 제외하고 단 한 번도 공을 차본 경험조차 없는 사람들이었다. 코치님께서는 첫날 축구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인사이드 패스를 가르쳐주시며 ‘공을 위로 띄우지 말고 똑바로 차면 된다.’는 아주 간단한 지시를 내리셨는데 공은 차는 족족 하늘 위로 치솟거나, 정면 근처에도 못 가고 크게 빗겨 나거나 심지어 앞으로 찬 공이 머리 뒤로 떨어지기도 했다.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경우를 왜 공에 비유하는지 몸소 느끼게 된 날이었다. 운동 시간을 20분 남기고는 실제 풋살 게임도 했는데 게임에선 더욱이 총체적 난국이었다. 공 하나에 사람 대여섯이 우르르 몰려들어 달려갔고 자신조차도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정처 없는 발길질들이 난무했다. 그러다 누구 하나 허벅지에 공이라도 맞으면 누가 공감 능력이 뛰어난 여자들 아니랄까 봐 우르르 몰려가 “괜찮아요?”를 연발하며 경기가 중단되기 일쑤였다. 우아하고 호쾌하다기보다는 난감하고 무모한 몸부림의 현장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축구팀에 참여한 첫날 어쩌면 이 운동이라면 조금은 더 꾸준히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운동에 재미라는 걸 붙여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그런 생각.
결론적으로 마의 3개월을 넘겨 아직까지 매주 축구를 하고 있다. 처음엔 공도 똑바로 못 찼던 사람들끼리 모였지만, 이제 드리블 비슷한 것도 하고, 패스도 5개 중 3개 정도는 정확하게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또 어쩌다 보니 외국인 용병이 3명이나 들어와서 팀의 전력도 한층 강화되었다. (그래 봤자 다른 팀이랑 경기하면 10경기 중 1경기 비기고 1경기 이기는 정도지만. 골은 당연히 용병들이 넣는다.) 비록 처음 축구를 시작할 때 품었던 왕십리 채지단의 꿈은 고이 접어 묻어두었지만, 저돌적인 모습이 나와 비슷하다며 윤호가 추천해준 가투소 정도는 롤모델로 삼아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나는 그렇게 축구를 시작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KsAaDzqHbI&t=
우리 팀 유니폼. 등번호는 내 나이가 서른셋... 이기 때문은 아니고 내가 좋아하는 야구팀(LG Twins)의 박용택 선수 등번호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