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3부. 흔적 없는 하루들

by 윤휘

오늘도 빈 페이지다. 뒷면의 잉크가 비치지 않는 것 보니 뒷면에도 글자는 없을 듯하다. 나풀거리는 종이만 남았다. 책 커버를 넘겼지만 진정 이야기가 시작되는 첫 페이지는 언제쯤 나올지 미지수다.


지루한 걸까. 달라진 것이 없다. 사람들이 출근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시간, 나 또한 달려서 버스를 잡아탔던 그 시간이 되어서야 잠 속에 묻혀있던 내 몸을 깨운다. 창문이 암막 블라인드로 가려진 탓에 천장은 시계가 가리키는 숫자와 상관없이 회색빛이다. 왜 자꾸 내 세상은 회색인 거지. 어제도, 오늘도, 아마 내일도.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모른 채 딸아이는 아직 내 어깨에 코를 묻고 있다.




"엄마 사랑해요!"


아이와 함께 장난을 치던 중 갑작스레 딸이 나를 끌어안았다. 귀는 분명히 들었다. 하지만 내 두 팔과 고개는 알아듣지 못했다. 아이의 가슴팍에 묻힌 코를 아이의 몸과 팔 사이로 내밀어보았지만, 늦었다. 이미 마음이 잠식당했다. 분명 아까는 없었던 검은 기운이 돌연 내 면전에 나타나 '이번엔 벗어날 수 있겠냐'라고 조롱해 댔다. 내 목을 나선형으로 칭칭 감쌌다. 펑, 아이의 품 속에서 나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증발해 버릴 것만 같았다. 구부러져 있던 두 팔을 힘껏 펼쳤다. 아이는 내 팔의 길이만큼 뒷걸음질 쳤다.



"… 하……. 응…. 엄마도 사랑해."



어긋났다. 나의 몸과 나의 입이, 아이의 말과 나의 대답이. 아이의 눈은 순간이라고 하기에도 뭐 한 찰나의 포옹이 무슨 의미인지 묻고 있었다. 나의 마음과 몸의 엇박자를, 나도 제어할 수 없는 이 상황을, 아이에게 설명할 수 없었다. 말로 옮길 수 없었다. 외면해 버렸다. 대답을 원하는 눈을 뒤로한 채 저녁 준비를 해야겠다며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스레인지 위에서 콩나물국이 끓어오르려고 냄비 벽면을 타고 여기저기 한 방울씩 거품이 터지고 있었다. 나는 텅 빈 하루를 살아가고 있으면서 대체 왜 무엇에 부담을 느끼고 있는 걸까. 회사가 아닌 또 다른 이유가 생긴 걸까. 뚜렷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답을 찾기 어려운 것인지, 아니면 답과 마주하면 작아질 나를 그리며 일부러 피하는 것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비 안의 국물 거품이 부글부글 솟아올랐다. 살고 싶어서 숨 쉬려고 올라오는 걸까. 이렇게 생각하며 가만히 보고 있자니 거품들이 아까보다 더 열기 차게 말간 물 표면 위로 올라왔다.




짓누르는 압박감에 어깨 통증을 느끼고, 누워만 있는 탓에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무릎과 발가락 관절이 쑤셨다. 가지지 않아도 될 무거운 마음발목을 붙들고 늘어지는 큰 쇳덩어리가 되었고, 통증은 몸 곳곳으로 번졌다.


무엇이 나를 압박하고 있는 걸까. 이유를 알 수 없다는 사실만 또렷하다. 이 공백이 나를 설명하는 전부가 되어버릴까 봐 두렵다.




해가 바뀌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지난해의 나인 채로 흘러간다. 해가 바뀌는지 실감조차 못하던 이유는 1월 1일을 소홀히 맞이했기 때문일까. 내게 2026년 1월 1일은 설렘보다는 그저 수많은 목요일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열두 달 중에 하나인 1월이었다. 그 1월처럼 나도 365일 중의 하나인 나였다.


나는 이 아픔을 단칼에 끊어낼 수 있다고 여겨왔던 것일까. 회복을 위해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는 의사의 말에도 난 단숨에 잘라버릴 수 있다는, 낙담이 되어버릴 희망을 품고 었던 것일까.


365일 하루라는 점을 이어 삶이라는 곡선을 그다. 가끔은 진하게 가끔은 흐릿하게. 가끔은 높게 가끔은 낮게. 가끔은 멈추기도 한다. 멈춤도 나의 일부라고 받아들인다면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잠재울 수 있을까.


나는 공백을 지나고 있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