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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융융이 Feb 14. 2018

밸런타인데이를 준비하는 자세

뭘 하든 어린이날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

한국에서 밸런타인데이가 어떤 의미였는지 돌이켜 보면, 연인들 간 혹은 이성 간에 사랑을 전하는 날.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주는 날. 이렇게 기억 속에 남아있다. 밸런타인데이 자체의 의미도 연인들 간의 사랑에 대한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도 막연히 그럴 것이라 생각했었던 것 같다.


물론 연인들 간에 사랑을 표현하는 날이라는 것 자체는 그다지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즐기는 방식(?)의 차이를 조금 느낀다. 정말 연인들 간의 전유물이라고 하기보다는 더 넓게 '함께' 즐기는 문화라고나 할까.


지난주에 막내가 학교에서 명단을 하나 받아왔다. 반 애들의 이름이 주욱 담긴 종이였는데, 대체 왜 주는 것일지 몰라 다른 학부모에게 물었다. 같은 반 친구 중 일본계 캐나다인에게 물었다.

(참고로 일본계 캐나다인인데 무척 영어를 잘 한다. 일본인의 그 특유의 '메워도 나르도' 같은 발음도 전혀 없다. 그렇다고 완전 현지인과 같다는 것은 아니다. 듣기에 부담 없이 외국인으로서 정말 잘한다는 건데, 그거면 정말 완벽한 거다. 어쨌든 원래 영어를 잘 하던 편이 아니라 결혼하면서 넘어와서 피나는 노력을 한 케이스로 보인다. 여러모로 배울 점이 많은 친구다.)


"이거 명단, 왜 주는 거예요?"

"밸런타인데이에 카드 같은 거? 작은 거 나누라고 주는 거예요. 의무는 아니고 그냥 하고 싶으면 하고 아니면 안 해도 돼요."


참 이게 명단을 받고도 아무것도 안 한다는 게 무언가 의무를 소홀히 한 느낌적 느낌이 들더라. 실은 이곳에서는 남의 눈치를 잘 보는 편은 아니라 안 해도 정말 무방하긴 한데, 나는 여기 사람이 아닌 게 문제다. 나는 '한국인'이다. 게다가 이곳에 드문 한국인.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다가 14일을 하루 앞둔 13일 날, 코스트코로 향했다. 낱개 포장되어있는 초콜릿을 구매했다. 이것도 사는데 힘이 좀 들었다. 개인적으로 코스트코의 그 거대한 카트도, 무지막지하게 많은 대용량 사이즈 식품들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사봤자 남기면 다 쓰레기가 되는 거니까. 그래서 자주 가지 않는 편인데, 이날만은 어쩔 수 없었다.


와, 그런데 정말 입이 쩍 벌어졌다. 주차할 자리조차 없다니! 이 나라에 주차할 자리가 없는 경험을 딱 2번 해봤는데, 하루는 블랙프라이 데이, 하루는 바로 이날이다. 밸런타인데이 전날. 혹시 밸런타인 데 이 때문에 이렇게 많이 온건가? 싶었지만 이건 뭐 성급한 일반화가 될 수 있으니 그냥 넘기자. 쓸데없는 작은 생각의 조각들이 떠다니는 걸로.


무겁고 불편한 카트를 싫어하는 나는 그냥 손으로 얹어서 어떻게든 들고 다닌다. 딱 4 봉지를 샀는데, 이런...... 하나가 뚝 하니 떨어져서 내용물들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주섬주섬 주워 담으면서 '내가 지금 뭐하는 것일까? 나는 누구인가?' 등의 자아성찰 조금 하고, 영수증을 손가락 사이에 간신히 끼워서 출구로 나갔다. 내가 안타까워 보였는지 점원이 묻는다.


"How are you doing?"


솔직한 심정은 "니 눈엔 내가 어때 보이냐?"지만 역시 한국에서 한국식으로 Korean English를 배운 나는 억지 미소까지 띠며 '자동반사'로 대답했다.


"Good~"


말해놓고도 돌아오면서, '뭐가 good이야?!'라고 속으로 10번은 외치며 나 자신을 탓했다. 뭐하는 짓인가.....


포장지를 사기 위해 Daiso에 가서 이곳에서는 무척 드문 스타일, 귀엽고 아지자기한 포장지를 구매했다. 참 이게 무척 무척 드문데, 다이소에게 감사를 한다. 그나마 여기 아니면 이런 걸 어서 볼 수 있나 싶다. 다이소엔 (내가 원하는 게) 다 있다.


집에 와서 아이들에게 부탁했다.


"얘들아, 너네 친구들이니 좀 도와줘. ~~ 게 넣고, ~~ 해서, ~~ 해줘."

"네!!!!"


대답 한번 시원했다. 대답만.

그러고는 싸는 것보다 먹는 것에 치중한다. 많이 사 오긴 했는데, 이러다 다 먹어치울 기세다. 영 못 미더운 나는 그냥 아이들을 밀어냈다. 나 다 싸고 남은 거 먹어라.


뭐를 부탁하리오. 뭐를 기대하리오. 그냥 '초콜릿 맛있다'

끝-

그게 우리 아이들의 밸런타인데이다.


여하튼, 내일 뭣도 모르고 엄마가 죽어라 싸놓은 거 가서 나누겠지. 뭔지나 알고 나누면 좋겠건만. 한국에서도 남편에게 이렇게 포장해서 나누지 않았었는데, 살짝 미안하기까지 하다. '애들을 위해' 이렇게나 열심인데.


쏘리, 남편.

어쩔 수 없다. 여기가 다 이런갑다.

'Everyday is Children's day'라고 하더니, 역시...... 애들만 신났지. 뭐.

밸런타인데이조차 아이들의 날로 만들어 버리는 아이 중심주의의 끝판왕을 보는 기분이다.


밸런타인데이? 그거 아이들 초콜릿 나눠 먹(게 해주)는 날 아니었어?

이런 느낌!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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