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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융융이 Feb 23. 2018

너 술 마셨냐?

네가 보태줬냐!

캐나다로 오면서 가장 좋았던 것 중에 하나는 아무도 생김새, 옷, 물건, 차 등의 가지고 있는 또 다른 무엇인가로 사람을 평가하는 경향이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편견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으로 힘든 생활 중에서도 꽤 위안을 얻곤 했다.


그중에서도 아이와 관련된 일에는 유독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엄마이기에, 아이에 대한 평가가 유연하다는 것이 무척 좋았다. 특히 생김새에 관한 그 어떤 언급도 들을 수 없다는 것이 마음의 짐을 꽤 내려놓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우리 큰 아이는 한쪽 눈에 안검하수가 있다. 이 안검하수라는 것은 병이라기보다는 증상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눈꺼풀 근육에 힘이 없어서 잘 움직이지 않는다. 최대한 뜬다고 떠도 묘하게 째려보는 듯한 인상을 주는데 모두 눈꺼풀에 약간 이상이 있어서다.


태어나서부터 왼쪽 눈이 잘 떠지지 않아 걱정을 했었는데, 내가 짝눈이라 아이가 닮는가 보다 했었다. 그런데 다래끼 때문에 갔던 안과에서 아무래도 큰 병원에 가서 제대로 진단을 받아보라고 하더라. 눈에 증상이 있는 것 같다며. 그래서 소개받고 간 대형병원에서 '안검하수'라 진단을 받고 시력에 이상이 생기지 않는지 확인하는 검사를 종종 받았다. 눈꺼풀이 가리면 시력이 나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수술도 나이가 들면 하라고 권하더라. 미관상으로도 그렇고 불편할 수도 있기 때문에. 아직은 어려서 수술보다는 시력에 영향이 없는지만 확인하는 편이 좋다고 했다. 별거 아니라면서.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별거 아닌 게 아니더라. 무엇보다 많은 사람들의 지속적인 물음이 불쾌했다.


"얘 졸려요?"

"얘 눈이 왜 이래요?"

"눈이 어디가 다쳤어요?"


안면이 있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지나가던 낯선 이들도 스스럼없이 물었다. 몇 번은 가던 길을 도로 돌아와서 묻더라. 눈이 대체 왜 이러냐고.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도 물었다. 어디 다친 거 아니냐고.


어려서 아이는 인식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변명은 내가 해줬다. 별거 아닙니다. 그냥 졸려요. 안검하수라는 증상이에요. 대답도 내키는 대로 하게 되더라. 매번 너무 많은 사람들의 많은 질문에 답을 하는 게 귀찮고 짜증도 나더라. 그 사람들은 내가 한 명이었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여러 명이 같은 질문을 여러 번 반복해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무지 그 관심이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설사 문제가 있다 한들 왜 이리 깊게 알려들까라는 마음과 우리 아이가 다치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는 사람들의 얄팍한 관심이 괘씸하고 싫었다. 그리고 아이도 점차 자라면서 자기 눈이 이상하냐고 묻더라. 자랄수록 조금씩 걱정이 되었다.


그러다 캐나다로 오게 되었는데, 아무도 묻지도 관심을 갖지도 않더라. 아이의 눈에 대한 일종의 강박관념이 생긴 지 오래인 나는 으레 담임 선생님과의 미팅에서 아이의 눈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병이 아니고, 아픈 게 아니고 이상이 없다. 째려보는 게 아니다는 이야기도 했다. 선생님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전혀 몰랐다고 하더라. 그랬냐며.


약간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아무도 아이의 눈에 관심이 없구나. 혹은 이상해 보여도 그걸 입 밖으로 꺼내서 아이에게 상처 주는 것은 금하는 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안도의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서 아이도 점차 자신의 눈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머리 속에서 지웠다. 바로 얼마 전까지는 말이다.


거의 눈이 안검하수 증상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조차 가물가물해질 무렵, 한 형-대략 12살 정도 되는-이 우리 아이에게 말했다.


"야, 너 술 마셨냐?"

그러면서 더 말을 보탰다.


"얘들아, 얘 술 마셨나 봐!"


물론 한국어다. 즉 한국인들의 모임에 갔다가 겪은 일이다. 아이는 한국서 온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무런 잘못이 아닌 듯이 아이의 생김새로 아이에게 상처를 내더라.


"엄마, 나 눈 내 학교 친구들도 다 이상하게 생각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하면 어떻게 해요?"


아이를 꼬옥 안고 말했다.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너에게 그런 말을 한 사람이 이상한 거야. 자기 눈이 삐딱하니까 다른 사람 눈도 이상해 보이는 거야. 신경 쓰지 말자. 엄마가 늘 말하잖아. 나쁘게 말하는 사람 자신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아이가 불안함에 손과 발을 꼼지락 거리다가 잠들더라. 이불을 덮어주고 아이의 옆에 한참 앉아있다가 방으로 돌아와 속상함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왜? 무엇 때문에? 다른 사람을 자신의 잣대로 규정하고 평가하고 상처 주는 것이 당연한 것인가?


당분간 한국인 모임에 아이를 데려가지 말아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기에 이르렀다. 아이가 스스로 단단해져서 상처받지 않을 때까지 지켜주는 것이 엄마의 역할이지 않을까. 가슴에 무거운 돌이 하나 들어앉았다. 답답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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