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9. 누구 지도 있는 사람?
생리 둘째 날이란 무엇인가. 생리 둘째 날이란, 침대에서 나와서 책상에 앉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의지를 칭찬해주어야 하는 날이다. 생리 둘째 날이란, 무엇인가를 미루거나 하지 않기로 결정하거나 취소한다고 해도 대체로 용서 가능한 날이다. 그런 날 10km 마라톤을 완주했다. “생리 둘째 날 10km 완주를 했어.” 이 말을 들은 나의 모든 여성 지인들은 아아- 한 뒤에 박수를 쳐주었다. 여자들은 내가 해낸 일이 뭔지 알고 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일상의 혁명 생리 컵이 아니었더라면 이룰 수 없었을 생의 업적입니다! 메달을 들고 소감을 말하라고 하면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아무도 소감을 묻지 않은 게 반전이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아디다스가 이해되지 않았다. 많이 내리지는 않지만 비가 내린다잖아. 어서 취소 문자를 보내! 폰을 붙잡고 있어봤자 바뀌는 건 없었다. 나는 5만 원을 냈고, 가야 했다. 하지만 꼭 가야 할까? 일단 기념품은 받았으니까 5만 원 정도 대충 퉁쳤다고 쳐도 되지 않나? 아니,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빨강 티셔츠에 홑겹 가방에 5만 원을 썼다고 생각하면 피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래, 가자. 집에서 여의도공원까지 1시간 40분이 걸리는데 아무리 늦어도 7시 10분까지는 가야 하는 걸 아는 친구가 마포구청역 새집에 와서 자고 가라고 했다. 하지만 기다린 것처럼, 예정일보다 일찍, 마치 마라톤 날에 생리 둘째 날을 맞추기 위해 계획이라도 한 것처럼 새로운 주기를 시작하기 위해 몸이 자궁벽을 허물기 시작했고, 나는 친구네 쇼파에서 자는 대신 집으로 돌아오는 걸 택했다. 당연히 12시에 잠이 올리 없으니까 축구를 보며 그림을 그리는 사이 1시가 되고, 2시가 되고... 잔 것도 안 잔 것도 아닌 채로 3시간 정도 침대에 누워있다 보니 알람이 울렸다. 와, 진짜야? 이대로 가야 돼? 정말 믿기지 않지만 가야지 어떡해.
작년 마이런 끝나고는 내년에는 반바지를 입겠다, 헤어밴드를 사야겠다, 암밴드도 필요하지 않냐 온갖 계획을 세웠지만, 1년 전의 내가 1년 뒤의 나를 지나치게 신뢰하고 있었음이 드러나고야 말았다. 그나마 허리 라인이 들어간 여성용 티셔츠 대신 남자 미디움 사이즈 티셔츠를 주문한 정도만이 변화였다. 그리고 지난 일본 여행에서 친구의 강력 추천으로 사 온 러닝용 양말. 새 러닝화는 발에 적응이 안된 상태라 그나마도 작년에 신었던 러닝화를 신고, 똑같은 레깅스를 입고 집을 나섰다. 그냥 걷는데도 다리가 삐걱거렸다. 몸이 한 1톤쯤 되는 거 같았다. 비가 아무 때나 내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낮은 하늘 아래를 걷고 있는 혈압이 낮은 생리 둘째 날의 여성을, 반쯤 나간 혼이 위에서 내려다보며 자신의 예감을 전해왔다. 알고 있지? 오늘은 망했어.
겨우 짐을 맡기고, 친구를 만나고, 콜드브루를 나눠마시다가 애매한 상태로 출발선에 섰다. 왜 1시간 이내 완주를 목표로 하는 A그룹에 신청하라고 했냐(할 수 있다!)면서 나를 타박하던 친구가 앞서 떠나고, 나는 홀로 서서 음악을 세팅했다. 당연히 세팅이랄 것도 없었다. 언제나 같은 앨범이다. 뮤지컬 <Dear Evan Hansen>의 OST. 오늘은 전곡으로 설정한다. 5번 트랙의 ‘레퀴엠’만 넘기고 전곡을 들으면 대충 53분. 장송곡을 들으면서 달릴 수는 없는 일이니까. 노래 넘기는 건 간단하지. 나에게는 에어팟이 있으니까, 왼쪽 에어팟을 톡톡. 그러고 보니 에어팟 소지자 정모라도 하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다들 장비를 구비하느라 고생이 많으십니다. 애플워치를 차고 말해본다. 멍청한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얼떨결에 1시간 20분 이내 완주를 목표로 하는 C그룹, 그러니까 내가 속한 그룹이 출발했다. 출발선을 밟으며, 나이키 러닝 앱의 시작 버튼을 눌렀다. 동시에 경쾌하게 첫곡 'Anybody have a map?'이 흘러나왔다. “Can we try to have an optimistic outlook? Huh?” 정말 언제 들어도 Huh? 부분이 좋단 말이야. 생각은 거기서 끝이었다. 왜냐하면, 출발과 동시에 왼쪽 고관절과 골반이 아프기 시작했고, 점점 말도 할 수 없게 아프기 시작했고, 삐걱거리다 못해 분리시키고 싶을 정도로 아프기 시작했고, 이윽고 겨우 2킬로 만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이건 아닌데? 완주 못하겠는데? 오직 그 생각만을 하면서 다리를 끌며 뛰고 있는데 뒤에서 “윤이나!”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토지에서 함께 달리기 대화를 나누고 함께 신청을 한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저 죽을 거 같아요...”하는 내 외마디에 안쓰럽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자기 페이스로 착착착 나아가기 시작했다. 놀랍다. 저렇게 몸이 가벼워 보일 수 있다니. 저렇게까지 사람이 산뜻할 수가 있다니. 하지만 나로 말하자면.. 이건 안된다. 양화대교 건너면 자연스럽게 합정역으로 들어가야 된다. (이 생각을 할 때는 짐이 결승점에 가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양화대교가, 차가 다니지 않는 다리를 달린다는 것이, 어쩔 수 없이 너무 좋았다. 그리고 나의 뮤지컬은, 1막 마지막 곡이 울려 퍼지는 중이었다. “So let the sun come streamin’ in. ‘Cause you will reach up and you’ll rise again. If you only look around you will be found.” 그렇다면, 일단은 계속 달려보는 수밖에. 비록 너무 많은 사람들이 나를 앞질러가고 있지만, 마지막에 이렇게 말해야 하니까. “적어도 걷지는 않았어.”
1시간 16분 03초. 5km 이후 구간은 대체로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애플워치에 진동이 울려서 보면 힘을 내라는 문자가, 미리 도착한 친구가 맥주를 마시고 있다는 문자가 도착해서 그때마다 한 발자국 씩은 더 옮기려고 했던 것 같다. 겨우 10km에 이토록 비장한 이유는, 오늘이 생리 둘째 날이기 때문이고, 다시 말하지만 오늘의 영광은 20세기 최고의 발명품 생리컵에게, 그리고 벗은 뒤에 비로소 가치를 느꼈던 러닝 양말에게 돌린다. 그리고 달리는 한 영원히 들을 노래들에게, 저의 세 번째 메달을. 적어도 걷지는 않았으니까, 이 영광을 무엇보다 나에게.
10월에 참가하려고 했던 서울달리기 하프 마라톤을 취소한 나, 정말 칭찬해.
아이패드 프로와 펜슬을 산 게 아까워서 시작한
나 자신과의 1년짜리 약속.
ps. 나에게는 셀프 약속을 잘 어기는 재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