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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나 Sep 24. 2018

한가을과 반지의 여왕


026. 반지의 여왕

추석 전야, 고향-그래봤자 서울의 위성도시-의 친구들과의 만남이야 늘 있는 일이지만, 이번은 조금 달랐다. 친구들이 서로 남편을 소개시켜주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남편은 커녕 비혼의 아이콘이 되어가고 있는 나로서는 굳이 안 가도 되는 자리였지만, 뭐 일단 술과 음식이 있다면 가볼까 하는 마음으로 간 친구 집에는 어쩐지 송구스러운 조니워커 블루라벨 두병이 있었던 것이다. 야, 이거 마트에서도 삼십만원이야. 헐, 원고지 20매는 써야 버는 돈 아닌가 하는 소심한 마음은 입 밖으로 내지 않고, 굳이 주문한 토닉워터에 타서 레몬 슬라이스를 넣고, 저거저거 조니워커 블루라벨로 하이볼을 해먹는다는 비난을 들으며 달리기 시작한 시간 다섯시 반. 여덟시 쯤에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는 집주인을 제외하고 양주 두병을 말끔히 비운 네 사람은 사이좋게 엉망이 되고 말았다. 4세 아이와 영어로 대화를 한다거나, 술을 마구 섞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와중에 나는 친구의 4세 딸이 끼고있는 보라색 보석반지를 갖겠다고, 다른 플라스틱 반지를 그러모아 손에 끼고서는 보라색 보석반지와 바꾸자고 생떼를 쓰다가 애를 울리고는 모른 척 하고 안마의자에 몸을 맡겼다가 후다닥 엄마 집을 향해 길을 떠났다. 이렇게 쓰다보니까 정말 미친 이모 같은데.. 여하튼 그 와중에 또 5키로 정도야 뛰기도 하는데 걷는 거야 가뿐하지 하면서 집까지 미친듯이 걸어간 것이다. 그러다보니 술이 깨고, 어쩐지 걸음을 멈출 수 없게 되고, 왼손 중지 약지 소지에는 플라스틱 반지가 끼워져있고, 달은 완전히 차다 말았고, 너무나 가을이었다.

그야말로 가을의 한 중간이로구나, 할 밖에.



그림일기 365

아이패드 프로와 펜슬을 산 게 아까워서 시작한
나 자신과의 1년 짜리 약속.

ps. 나에게는 셀프 약속을 잘 어기는 재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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