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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나 Oct 10. 2018

내일은 거품목욕을 할 거야

031. 욕조


욕조가 있으면 삶이 윤택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벌써 13년 전, 유럽여행을 갔을 때다. 파리에서 머물렀던 숙소는 돌이켜보면 지금의 에어비엔비 같은 형식으로 나와 주인 언니 둘만 묵는 집이었는데 욕조가 있었다. 엄청 많이 걷고 돌아오는 길, 한 백인 남자가 집 앞까지 따라와서 뭐라 뭐라 떠드는 말에 두려움에 떨다가 한국어로 ‘나 프랑스어 못해요’(와중에도 존댓말은 썼다)라고 몇 번이나 말하고, 겨우 집에 들어왔던 날. 욕조에 채워진 뜨거운 물에 긴장한 온몸을 녹이며 생각했다. 아, 욕조란 좋은 것이구나.


당연히 그 이후에도 욕조가 있는 집에 산 적은 없다. 샤워나 제대로 할 수 있는 상태면 다행이었지. 지금 살고 있는 집에는 반신욕을 위한 간이 욕조가 있다. 평소에는 세워두었다가 원래대로 놓으면 욕조가 된다. 의외로 편리하다. 다리를 뻗을 수는 없지만 그럴 수 있는 크기라면 욕조에 물을 채울 때마다 수도세를 염려하게 될 테니, 차라리 낫다. 세상에 숨길 수 없는 게 세 가지 있다고 했던가요. 사랑은 알 바 없고 재채기, 그리고 가난...


여하튼 집 욕실은 뜨거운 물이 잘 나오고, 욕조에 물도 금방 채워진다.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스럽다. 이사 온 첫날 온갖 부산을 떨다가 욕조에 몸을 담가보겠다는 내게 친구가 바쓰 밤을 하나 주었다. 향이 좋다고 했고, 과연 그랬다. 물이 초록색이 된다는 점도 좋았다. 호수 같으니까. 혼자 낭만을 떨며 몸을 녹이고 어떤 새로운 시작을 맞이했던 밤. 생활의 수준이 나아지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던 밤. 저렴한 제품이라도, 방에 커튼을 달기로 결심한 밤이었다.


거품목욕을 하고싶은데 저렴한 바디워시를 사 오는 걸 자꾸 깜빡한다. 바쓰 밤도 좋지만 거품목욕을 위해서는 그냥 바디워시가 좋다. 향만 나쁘지 않다면 주르륵 물 위에 뿌리고 그 위로 샤워기를 세게 틀면 거품이 저절로 생겨난다. 호텔에 가면 잘 쓰지 않는 어메니티 바디워시로 거품을 만든다. 거품이 가득한 욕조에 가만히 누워있는다. 그런 시간들을 모아다가 일상을 견디고 버티고 꾸려나가는 데 다시 쓴다.


비가 내리고 있고, 내일은 기온이 떨어진다고 한다.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한때 기념했던 날이다. 쓸데없는 기억력이 좋다는 것은 마음을 지키는 데 있어 별로 좋은 일이 아닌 듯하다. 어찌 됐건 좋은 하루를 보낼 것이다. 보란 듯이. 여전히 누구 보라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림일기 365

아이패드 프로와 펜슬을 산 게 아까워서 시작한
나 자신과의 1년짜리 약속.

ps. 나에게는 셀프 약속을 잘 어기는 재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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