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그림일기

크림이 들어간 커피는 먹지 않았습니다.

Week 10.

by 윤이나

WeeK 10.


20190303 SUN

오늘 내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배수구를 뚫는 것이었다. 해결되지 않는 이야기라든가 쓰고 고쳐야 할 글들이라든가 당장 다음 달의 미래와 또 계획 같은 것은 문제로 삼지 않기로 했다. 눈에 보이는 것. 실체가 있고 잡히는 것만이 문제다. 비닐장갑을 끼고 배수구 홈을 잡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리는 것만큼 구체적인 해결 방법은 없는 것이다. 베이킹 소다를 붓고 기다리고, 다시 뜨거운 물을 붓고 기다리고, 그렇게 기다린 뒤 배수구 주위를 깨끗하게 솔로 닦아내고, 다시 청소솔 끝으로 홈을 힘을 주어 밀어내는 일. 그렇게 해결되는 일들만을 문제라고, 고민이라고 부를 것이다.

20190304 MON

식물을 찾는다. 나름 신중하게 고른다. 식물도 놓기 위해 가로로 긴 사이드 테이블을 샀고 그러니 너무 크거나 무거우면 안 된다. 하지만 너무 작은 것을 들여놓을 생각도 없다. 존재감이 있으면 좋겠다.


20190305 TUE

“나는 당신에게 증명할 필요가 없어.”


20190306 WED

친구들을 기다리며 랄라블라에서 칫솔 구경을 했다. 큐라덴 5460 칫솔을 2년째 쓰고 있는데, 떨어진 참이었다. 올리브 영에도 없더니 랄라블라에도 없었다. 롭스에서 사야겠다고 생각하며 화장품을 구경하는데, 초등학생들이 섀도가 3천 원 밖에 안 한다며 좋아했다. 틴트와 섀도를 손등에 발라 색감을 확인하는 걸 보면서 뷰티 유튜버들을 떠올렸다. 외모에 대해서 말하지 않기 위해서 외모에 대해서 더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겠다고, 그러니까 미디어가 외모를 어떻게 다루는가에 대해 좀 더 말하든가 쓰든가 여하튼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1년 만에 틴트를 샀다. 갑자기 스투키 임보를 시작했다.


20190307 THU

“내가 걷는 모든 걸음이 네 덕분이야”라고 말해준 너의 새 집에 둘 꽃을 보냈다.


20190308 FRI

아빠가 블랙커피를 마신다고 했다. 믿기지 않는 일이다. 아빠는 평생 프림(크림이 아니다)과 설탕이 들어간 커피를, 자판기에서라면 ‘밀크 커피’라고 되어있는 그 커피를, 맥심 모카 골드가 나온 이후로는 오직 맥심 모카 골드만을 마셔왔다. 어릴 때 아빠는 나에게 커피를 타는 법을 가르쳤는데(생각해보면 왜 그랬을까) 물을 적게 넣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언제나 물을 적은 듯하게 넣어야 맛있다는 것이다. 엄마는 아이스커피에는 언제나 설탕을 생각한 것의 두 배로 넣으라고 가르쳤다. 나는 아빠의 가르침은 컵라면에, 엄마의 가르침은 아무 데나 적용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 아빠가 블랙커피라니. 오빠는 카누가 아니냐고 했고, 언니는 어른들이 어디서 받아왔다면 애터미일 수도 있다고 했다. 집에 와서 엄마가 남겨둔 마지막 봉으로 확인해보니 맥심 부드러운 블랙커피였다. 블랙은 마시지만 맥심을 버릴 순 없고, 설탕도 버릴 순 없는 것이다. 조카들과 세 시간 놀아준 것으로 모든 기력을 소진한 나는 아홉 시도 안되어 요가 바닥에 꽉 차는 나의 오랜 골방에 누웠고, 누워서 쿠팡에서 맥심 부드러운 블랙커피 100봉짜리를 주문해서 배송시켰다. 이상한 방식으로 기억될 여성의 날이다.


20190309 SAT

키보드의 ㅈ 키, 영어로는 W 키가 잘 먹지 않는다. 한 번 키를 뜯어서 고쳤는데도 이런다. 지금 가계부 형편에 맥북까지 살 수는 없는 일이다. 손톱깎이 도구 모음을 이용해 임시방편으로 고쳐보았다. 나는 손을 움직여 뭘 만들거나 고치는 일을 좋아하는 편인데 그걸 일과 연결시킬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이상한 일이지 않은가.


201903010 SUN

10년도 훨씬 전에 미셸 투르니에의 <외면일기>를 선물 받고 읽은 뒤로, 생각이나 느낌, 고민,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 다짐 같은 것을 쓰거나 말하는 것보다는 그 날의 가계부나 그 날 오감을 통해 겪은 것을 기록하는 것이 내게는 일기가 됐다. 대체로 그렇게 기록하는 것이 좋다. 오늘은 이 일주일 치의 일기를 완성하기 위해, 그리고 아이패드를 살 때 뭐가 뭔지도 모르고 만 얼마를 주고 산 프로 크리에이트 앱을 사용해보기 위해, 유튜브의 강좌를 따라 그림을 그렸다. 초벌로 색칠해줍니다, 라고 말하고 색칠만 해서 당황했지만 일단 따라 해 보았다. 그런 관계로 지난 일주일과도 오늘도 하나도 상관없는 크림이 올라간 커피 그림을 그리게 되었고 이렇게 된 김에 내일쯤 크림이 올라간 커피, 나는 캐러멜 시럽을 싫어하므로 아마도 그냥 아인슈페너 정도를 먹기로 결정했다. 점심과 저녁 두 끼를 차려먹었고 3km를 뛰었고 다음 일주일을 위해 쿠팡에서 장을 보았다. 냉동실에 너무 오래 남아있는 호밀식빵을 러스크로 만들기 위해서 버터를 장바구니에 추가로 넣었다. 내일 광주에서의 재판 관련 기사를 한참 검색했다. 다음 주는 미정인 일정이 많다.



그림일주일기

아이패드 프로와 펜슬을 산 게 아까워서 시작한 프로젝트였는데 하루 한 개는 결국 포기하고 일주일에 한 개를 그리기로 했다는 소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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