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의 손끝에서 콘텐츠가 시작된다
일반적으로 '콘텐츠'는 일방향적으로 보거나, 듣는 방식으로 소비되어 왔다. 영화, 드라마, 음악은 물론 소셜미디어로 유통되는 수많은 디지털 콘텐츠도 마찬가지였다. 좋아요와 댓글을 통해 콘텐츠 제작자와 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에 '일방향적'이라는 표현은 다소 부적절할 수 있다. 다만, 어디까지나 소비자는 콘텐츠의 전개 과정에 어떤 개입도 할 수 없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최근 화제인 '블랙미러: 밴더스내치'(이하 밴더스내치)는 결을 달리 한다.
작년 말 공개 이후 줄곧 회자되고 있는 이 영화는 일종의 '인터랙티브 콘텐츠(interactive contents)'다. 인터랙티브 콘텐츠는 게임이나 영화, 책 등에서 이용자가 서사가 진행되는 과정에 개입해 영향을 미치는 형식의 콘텐츠를 뜻한다. 즉, '밴더스내치'는 이야기 전개에 시청자가 참여할 수 있는 영화라는 의미다.
'밴더스내치'는 하이테크놀로지 사회에서 고통받는 인간상을 그린 옴니버스 드라마 '블랙미러'의 특별편이다. 젊은 프로그래머 스테판 버틀러가 제롬 F. 데이비스가 쓴 밴더스내치라는 게임북을 게임화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그린 영화인데, 시청자는 이 과정에서 다양한 선택을 통해 이야기 전개에 개입한다.
아침 메뉴로 무엇을 먹을지부터 주인공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한 선택까지 시청자의 몫이다. 선택에 주어진 시간은 단 10초. 시청자는 순간적으로 빠른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필자는 슈가 퍼프와 프로스티가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골랐다...) 선택에 따라 10분 만에 엔딩에 도달할 수도, 2시간 넘게 이어지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혹여나 엔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이야기 전개의 주요 선택지로 돌아가 다른 선택을 내릴 수도 있다.
참고로 필자는 대부분의 엔딩을 본 것 같은데 약 4시간 정도 걸렸다. 처음에는 마음 가는 대로 골라보며 이야기를 진행했고, 이후 모든 엔딩을 보고 싶어서 사람들이 정리해놓은 공략집을 따라가 봤다. 한 가지 팁을 드리자면, 엔딩을 모두 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반복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는 10초 빨리 넘기기를 하면서 보면 불필요한 시간 소모를 줄일 수 있다.
'밴더스내치'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호평으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로튼 토마토 평점 8점대를 기록했고, 왓챠에서는 평균 별점 3.6점을 기록 중이다. 다만, 많은 엔딩을 본 이용자일수록 어느 정도 정해진 알고리즘에 따라 한정된 엔딩으로 유도한다는 점에서 아쉬운 이야기가 나오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밴더스내치'가 단순한 영화 감상 이상의 ‘경험’을 선사한 것은 확실해 보인다.
'밴더스내치' 이외에도 '디트로이트 : 비컴 휴먼'과 같은 게임이나 네이버의 인터랙티브 동화 오디오북 서비스 등 다양한 사례가 있는데, 최근 필자가 재미있게 본 것은 언론사의 인터랙티브 콘텐츠였다.
언론사의 인터랙티브 콘텐츠는 개발 작업을 통해 웹페이지에 인터랙티브를 구현하는 다이나믹 웹(a.k.a 다이나믹 HTML)이다. 웹페이지 상에서 소비자에게 선택지가 주어지고, 선택에 따른 결과값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다소 드라이한 콘텐츠로 여겨지는 저널리즘에도 소비자와의 감정적 교류가 중요하다는 인식이 퍼진 결과물이 아닐까 싶다.
필자는 중앙일보의 '수입 편맥 이상형 월드컵'과 경향신문의 '나의 학생시대'를 직접 플레이(?)해봤다. TMI일수도 있지만 필자의 수입 편맥 이상형은 '아사히 수퍼 드라이', 학생시대의 세대 카드는 '격변의 세대'가 나왔다. (맥주는 먹어본 것이 절반밖에 되지 않아 선택지가 좁았다) 각 링크 연결해두었으니 독자분들도 재미 삼아 한 번씩 해보면 좋을 것 같다.
지금까지 넷플릭스의 '밴더스내치'를 필두로 다양한 인터랙티브 콘텐츠 사례를 소개했다. 이렇게 보니 인터랙티브 콘텐츠라는 것이 참으로 새롭고 혁신적으로 느껴지지만, 사실 인터랙티브 콘텐츠는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누군가에게는 익숙하고 식상하기까지 할 인터랙티브 콘텐츠의 시작에 '게임북'이 있었다.
게임북은 독자에게 선택지를 주고 'O를 선택했다면, XX페이지로 가시오'라는 안내와 함께 이야기를 전개한다. 앞서 소개한 '밴더스내치'에 나오는 동명의 책 역시 게임북이다. 상업적으로 성공한 게임북은 1979년 출간된 '당신의 모험을 선택하세요' 소설 시리즈인데 1998년 184번째 시리즈까지 나올 정도로 장수했다. PC 게임이나 비디오 게임기가 없었던 1980~1990년대에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방식은 조금 다르지만, 독자(소비자)에게 선택권이 있고, 선택에 따라 다른 이야기가 이어진다는 점에서 오늘날 인터랙티브 콘텐츠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재미있는 점은 이 분야의 고전(古典)이라 할 수 있는 게임북이 재조명받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 텀블벅에서 진행한 출판사 딜라이트의 '올컬러 게임북' 펀딩이 목표 금액의 2000% 이상 달성한 사례도 있을 정도다.
이에 필자도 난생처음 게임북을 구매해서 체험해보기로 했다.
필자가 구매한 게임북은 작년 7월에 출간한 '늑대인간 마을에서 탈출'이라는 작품이다. 독자는 탐정이 되어 마을에 출몰하는 늑대인간을 찾아낸다는 이야기인데 다양한 선택지를 따라 추리를 이어간다. 목격 증언을 통한 단서 획득, 수수께끼 풀이 등 두뇌를 풀가동시키는 요소로 가득하다. (전두엽 간만에 열일했다...)
직접 해본 소감을 말하자면 정말 재밌다. 대사와 지문에 숨겨진 힌트를 발견하고, 나름의 추리 끝에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글로 다 표현하지 못할 쾌감을 선사한다. 아직 전체 스토리의 반의 반도 못 갔지만, 짜임새 있는 전개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게임북의 특성상 번호를 따라 책을 여러 번 폈다 접었다를 하게 되는데 그에 따른 손목 운동은 덤이다. 책갈피가 괜히 3개나 들어있는 게 아니었다.
인터랙티브 콘텐츠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게임북까지 체험해보니, 선택지를 준다는 것만으로도 다른 몰입감을 준다. 손 놓고 가만히 있어도 전개되는 일반 콘텐츠와 직접 참여를 해야 이야기가 전개되는 인터랙티브 콘텐츠는 몰입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물론 성향에 따라 매번 선택해야 하는 인터랙티브 콘텐츠가 번거롭게 느껴질 수 있다. 아마도 이러한 번거로움에 대한 개선이 앞으로 인터랙티브 콘텐츠 개발에 있어서 맹점이 되지 않을까 싶다.
에이전시에서 마케터로 일하고 있는 필자도 요즘 인터랙티브 콘텐츠를 구상하고 있어 더욱 실감한다. 여러 사례를 찾아보고, 기획에 참여하며, 제작되는 과정을 지켜보니 정말 다양한 이야기를 생동감 있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좋았다.
비록, 아직 보완해야 할 점이 많지만 인터랙티브 콘텐츠는 그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더욱이 콘텐츠의 본질이 점차 쌍방향 소통에 무게를 두고 있는 이 시점에서 인터랙티브 콘텐츠는 놓치기에 아쉬운 방안이다.
매력적인 인터랙티브 콘텐츠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발전할지 기대된다.
*본 콘텐츠는 마케팅 스터티 매거진 <YOMA> Vol.10의 콘텐츠입니다. 더 다양한 콘텐츠는 <YOMA> 매거진에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