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의 CMO가 된 후
정제된 콘텐츠를 통해 사람과 공간의 이야기를 조명해요.
회사 홈페이지에 들어갈 멤버의 프로필 카드를 제작했다. 함께 촬영한 프로필 사진에 각자 창업한 이 조직에서 하는 일, 혹은 하고 싶은 일을 문장으로 표현하기로 했는데, 나는 '정제'와 '조명'을 메인 키워드로 하는 소개 문구를 작성했다.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꼭 필요한 것을 정제하고, 콘텐츠를 통해 이를 널리 알리는 일.
어쩌면 나의 역할과 동기부여는 이 한 줄의 문장에 갇혔는지도 모르겠다.
1.
정신없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창업을 위한 급한 불을 끈 후 직전 회사에서의 직책과 경력, 창업 과정에서의 기여도에 따라 역할을 정리했다. 프로젝트의 마케팅 팀장이었던 나는 회사의 마케팅 총괄 이사(CMO)이자 회사 주식의 15% 지분을 갖는 주주가 되었다.
사실 부여된 높은 직급이나 주식 지분보다는 당장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가 중요했다. 허울뿐인 직급과 지분이 되지 않으려면 스스로의 역할 정의와 동기부여가 필요했다.
보통 COO, CFO, CMO 등 C레벨이라 하면, 각 분야에서의 전문성을 토대로 전체 업무를 총괄하는 경영진을 의미한다. 약자에서 알 수 있듯이 CMO는 마케팅을 총괄하는 경영진인데 이는 달리 말하면 회사 영업의 모든 것을 담당한다는 뜻도 된다. 제품과 서비스를 시장에 내놓고 판로를 개척하며 수익을 발생시키기까지 어느 하나 무관한 과정이 없기 때문이다.
처음에 이러한 C레벨의 의미를 찾았을 때는 그동안 해왔던 역할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선은 그동안 해왔던 대로, 나의 역할과 경력을 살려서 잘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2.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지만 창업 초반, 소위 '보이고, 알려지는' 것을 새롭게 만드는 일을 맡았다. 지난 편에서 진행한 사명과 브랜드 로고 개발부터 명함 디자인, 홈페이지 내용과 디자인 구성, 회사소개서 제작, 온라인 콘텐츠 제작 등 우리 회사를 보여주고 알릴 수 있는 다양한 수단과 방법을 개발했다.
참 즐거운 경험이었다.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막연했지만, 그만큼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가능성으로 가득했다. 우리가 회사의 아이덴티티와 히스토리, 멤버들이 가진 역량과 가능성을 재료로 그동안 갈고닦은 레시피를 실험해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나의 결과물을 믿어주는 멤버들의 신뢰가 가장 큰 힘이 되었다.
당시에 카페 브랜드 개발도 착수했는데, 우리 회사에서 운영하는 공간 1층에 새로운 카페 브랜드를 론칭하는 일이었다. 나는 회사 자체의 브랜딩 -앞서 얘기한 소위 보이고, 알려지는 일들- 을 총괄하고 있었기 때문에 카페 브랜드 개발은 다른 멤버들이 리드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진행 과정에서 아이데이션 미팅에 참여해 의견을 줄 수밖에 없었는데,
마케팅 권위자의 의견이 필요해요ㅎㅎ
그럴 때마다 멤버들은 '권위자'라는 다소 부담스러운 별명을 부르며 의견을 존중하고 수용해 줬다. 마케팅 관련 경력이 있는 사람이 나뿐이었고, 장난이 섞인 표현이긴 했지만 멤버들의 신뢰를 느낄 수 있는 별명이라 내심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빠르게 새로운 이야기를 채워가는 회사와 함께 나 또한 성장할 수 있었다.
창업 후 3개월이 흐르자 어느 정도 보이고, 알려지기 위한 최소한의 세팅이 완료되었다. 대외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홈페이지가 생겼고, 생태계 조직 가입이나 지원 사업 제출을 위한 회사소개서도 준비됐다. 멤버들은 저마다 미팅 시 자신을 소개할 수 있는 명함을 갖게 되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동반했다. 사실 C레벨이라는 역할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돌이켜 보면 앞선 과정들은 C레벨로서의 책임감 보다 마케터로서의 즐거움이 원동력이 되었던 것 같다. 초반 세팅에 온 힘을 쏟았던 3개월이 흐르고, 앞으로의 일들을 고민하자 그동안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역할에 관한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이 조직에서 CMO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나?
누구에게나 처음은 어렵듯이 나 역시 이번 생에 C레벨은 처음이라,
모든 부분에서 다시 의문이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