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_ 등 떠밀어 간 듯한 여행

설렘 없는 여행을 시작하다

by 사람 여행자

본격적인 미국 여행 시작도 전에 저는 치쳤습니다.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비행기가 이륙하는 그 순간에도 저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죠.

누가 등 떠밀어 간 듯한 씁쓸한 기분마저 들었습니다.

설렘이 없었어요. 잔인하게도.


지난 스위스, 이탈리아, 영국.

유럽여행이 끝나고 1년 뒤, 다시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이번에는 미국에서 출발해 남미로 끝나는 6개월간의 대장정이었죠.

또 그 이야기를 모아 반드시 책으로 출판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시작부터 여행 권태기가 온 것일까요.

어떤 바보 같은 일이 내 발목을 부여잡고 있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림짐작되는 원인이 네 가지 있습니다.



-최악의 컨디션

출국 전 일주일 동안 병원만 세 번을 갔어요. 가을이 다가오고 있던 환절기라 그런지 끔찍한 감기에 걸려버렸습니다.


- 헤어짐

여자 친구와도 헤어졌어요. 오직 여행이라는 이유로 말입니다. 우리가 만났던 기간보다 제가 여행하려는 시간이 더 길었으니, 기다려달라는 말도 할 수 없었어요. 게다가 잘 이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우울증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코 앞에 두고 있을 때였어요. 누나랑 아버지 우울증에 관한 이야기를 했죠. 이번에 전문 상담을 받을 것 같은데 돈이 꽤 나올 것 같답니다. 저는 여행 때문에 애써 모른 척했어요.


-출판의 목표

여행 수필을 쓰겠다는 강렬한 목표가 생기니까 조금 부담스러웠습니다. 뭔가 특별한 이야기를 모아야 할 것 같았어요.


(그런데 이 불안감은 나중에 해소됐습니다. 스스로가 아니라 남을 신경 쓰면서 여행한다는 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여행 이야기를 낳을 게 뻔했거든요.)





긴 여행을 앞두고 왜 이렇게 포기한 게 많은 걸까요.

여행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걸까요.

몸도 마음도 시작부터 지쳐버렸습니다.


다가올 여행이 순탄한 것도 아니었어요.

출국 사흘 전, 일찍이 구해둔 미국 호스트에게 안부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혹시 모를 변동 사항이 생겼을지도 모르니까요.


"Yoon! 나는 잘 지내고 있어. 너는 어때? 그나저나 나도 9월부터 여행을 떠날 예정이야."


저는 8월 말부터 9월 중순까지, 총 2주간.

호스트 데니의 집에 머물기로 약속했습니다.

모처럼 떠나는 장기 여행이었기에 그 출발을 공들여 계획했죠.

그런데 인제 와서 무슨 뒷북입니까?


나흘만 지나면 당장 미국으로 가는 마당에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겼습니다.


"데니. 저 2주간 머물기로 하지 않았나요? 9월에 떠난다니요."

"9월 9쯤에 떠나는 거야. 그래서 예정대로 일주일 정도는 머물 수 있어. 2주를 머문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예정대로 일주일이라고?

그 순간 불현듯 뭔가가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호스트 데니의 프로필에는 '우선 일주일 지내보고 서로가 마음에 들면 더 지내보라'라는 조건이 있었어요.

저는 호스트가 제 마음에 들든 아니든 딱 2주만 지내고자 했습니다.

반대로 호스트가 저를 거부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어요.


그것도 모르고 저는 호스트 프로필에 쓰인 대로

"우선 일주일만 먼저 지내보겠습니다"라고 메시지를 보냈던 겁니다.

그 내면에는 일주일 수습 기간(?)이 끝나면 한 주를 더 연장하겠다는 의미가 담겨있었죠.

하지만 호스트는 그 일주일까지 저를 받고, 이후 자신의 여행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하하..

덕분에 출국 직전, 다가오는 일주일 계획이 통째로 사라졌답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하지 않던가요.

차라리 출발부터 실망감을 떠안는 게 낫다고 위안해봅니다.

조금이라도 좋은 일이 생기면 더 기뻐할 테니까요.


6개월간의 여행, 그 시작을 액땜한 셈 치겠습니다.



혹시 질문이나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다면 인스타그램이나 이메일, 댓글로 남겨주세요.

낮은 자세로 항상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인스타그램: yoon_istraveling

이메일: yoonistraveling@gmail.com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