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혼모 내집 마련기7
구하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강제로 쉬게 된 시간이 있었다.
아르바이트까지 포함하면 20년을, 제대로된 직업을 갖고 일한 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단 하루라도 ‘멈춤’이라는 단어를 허락하지 않고 일만 해오던 내게 어느 날 갑작스레 찾아온 공백기였다.
1년 단위의 계약직으로 일하다 보니 매년 새로운 직장에 적응하는 일은 이미 익숙했고, 주된 업무가 바뀌는 것은 일상과도 같았다.
그럼에도 변덕스러운 환경 속에서 꾸준히 같은 분야를 지켜내며 경력을 쌓아왔다는 사실에 스스로 기특함을 느끼곤 했다.
“그래도 나는 흔들리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 그렇게 작은 확신과 자부심으로 나를 달래던 시기였다.
그러나 둘째를 임신하는 순간, 그 조심스레 쌓아 올린 일상의 톱니바퀴들이 한 번에 고장 난 듯 멈춰버렸다. 임신과 출산이라는 거대한 사건 앞에서 나는 오롯이 내가 모아둔 돈만으로 버텨야 했다.
게다가 집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국가의 여러 지원에서 제외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의 허탈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매달 위기가정 지원을 신청하라는 편지는 왔지만 나라에서 전달하는 의무적인 안내문일 뿐이었다.
빚이 2억이 넘게 있어도, 지금 당장 벌이가 끊겨 숨을 죄어오는데도 ‘집이 있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현실은 차갑고 잔인했다.
가장 무서웠던 순간은 관리비조차 내지 못하게 되었을 때였다.
태어나서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두려움—전기가 끊길 수도 있다는 공포가 밤마다 목을 조여 왔다.
온수 공급이 중단되면 생후 100일 갓 넘은 아이를 차가운 물로 씻겨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관리실에서 “다음 달까지 납부가 되지 않으면 전기와 온수 공급이 중단됩니다”라는 통보가 도착했을 때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손끝이 차가워졌다.
자존심이고 체면이고 모두 내려놓고 결국 행정복지센터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돌아온 대답에는 단호하고 차갑게 느껴졌다.
“집이 있으니 위기 가구 지원은 어렵습니다.”
담당 공무원의 입에서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 입술은 떨리고 눈앞이 침침해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울음은 내가 아니라 그분이 먼저 터뜨렸다.
“도와드릴 방법이 없어서… 정말 죄송해요.”
그 진심 어린 말 한마디가 오히려 내 가슴을 더 깊이 찔렀다.
그분은 서랍을 조심스레 열어 작은 종이가방을 꺼냈다.
각종 행사 후 남은 홍보용 수건과 치약, 비누 같은 생활용품이 담겨 있었고, 방금 쪄낸 듯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시루떡 두 덩이를 내 손에 쥐여주었다.
따스한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온몸으로 퍼지는 순간, 그동안 참아온 마음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며 눈물이 고꾸라지듯 쏟아졌다.
그 시루떡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었다.
‘당신 힘들지요. 나라도 도와주고 싶어요.’
그런 마음이 온기처럼 전해져 오는 위로였다.
집이 있어서 좋다고 믿었는데, 그 집 때문에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 그날따라 유난히 서러웠다.
“내가 왜 집을 샀을까. 왜 이렇게 살까.”
자책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세금 감면 기간이 지나지 않아 팔기조차 어려운 상황은 더 깊은 무력감을 주었다.
집을 팔아도 갈 곳이 없는 현실, 관리비 한 달치도 내지 못하는 상황을 누구에게 쉽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했다.
아이에게 분유를 먹여야 했고, 기저귀를 갈아줘야 했다.
국가의 저소득 지원을 통해 기저귀와 10만원 상당의 아기 물품을 구입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지만 매달 대출이자와 관리비를 합치면 최소 250만 원은 필요했다.
숨만 쉬어도 돈이 새어나가는 것 같은 현실 앞에서 나는 점점 무너져 갔다.
하지만 무너진 자리에서 멈추지 않기 위해 나는 곳곳에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도움을 줄 만한 사람을 찾고, 단체를 찾고, 기관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우리한부모지원센터의 상담을 통해 내가 ‘복지 사각지대’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처음 들었다.
그리고 정말 기적처럼 200만 원가량의 생활비를 지원받아 3개월 동안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날은 긴 가뭄 끝에 비가 쏟아지는 듯한 날이었다.
이어 러브 더 월드라는 미혼모를 지원하는 종교단체에서 관리비 납부를 도와주었고, 내 상황을 알게 된 지인들도 손을 내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힘들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너무 부끄러웠다.
마흔의 나이에 “관리비가 밀렸어요, 세금 낼 돈이 없어요”라고 털어놓는 일이 얼마나 수치스러운지 모른다. 그러나 한 지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너 지금 배부른 소리하는 거야. 네 아이가 분유가 없어 굶고 있는데도 자존심이 더 중요해?”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건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아이의 생존이 걸려 있었고, 나의 삶이 걸려 있었다.
그 뒤로 나는 더 이상 숨지 않았다.
힘들다고 말했고, 문을 두드렸고,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 과정에서 인간관계도 다시 보였다.
나의 어려움 때문에 멀어진 사람도 있었지만, 오히려 나의 어려움 때문에 더 따뜻하게 다가온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1년 반의 강제 백수 생활은 결국 마지막 남은 엔화를 환전해 생활비로 쓰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가난했고, 불안했고, 눈물 나는 순간도 많았지만 분명한 한 가지를 배웠다.
두드리면 문은 열린다는 사실이다.
내가 움직이면 길이 생기고, 구하면 누군가는 반드시 응답한다는 것.
부끄럽고 약해 보이더라도 말하면 도움의 손길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다가온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깨달음 하나—
잠시 멈춰 서도 괜찮다는 진리였다.
그 시간을 건너오며 나는 더 단단해졌고, 더 많은 것을 보았고, 다시 살아갈 힘을 되찾았다.
무너져도, 주저앉아도, 두드리면 열린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다시 손을 내밀자고, 나는 오늘도 마음속으로 조용히 되뇐다.
“구하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 참고
기저귀 지원 사업: 중위소득 80% 이하의 저소득 가구는 월 9만원 상당의 기저귀 구매비용을 누구나 지원 받을 수있다
양육물품 지원 사업: 전국 6곳의 미혼모 거점 기관을 통해 약 10만원 상당의 양육물품을 매달 지원 받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청소년 미혼모를 중심으로 지원하고 있으며 소득 분위도 중위소득 72%로 허들이 높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