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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제 Dec 20. 2022

82만원..

하룻밤 자존심과 맞바꾼 돈

간혹 그런 날이 있다.

어쩔 수 없는 날.. 그럴 수밖에 없었던 날..




운동에 빠져 살던 요즘..

술도 마시지 않고 외출도 하지 않고 헬창은 아니지만 헬창 코스프레를 하며 나름 뿌듯한 삶을 살던 요즘..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회사 거래처 사장이 "형님.. 형님.." 하며 언제 술 한잔 하자는 제안을 자꾸 해왔다.

나보다는 어리지만 그래도 자꾸 거절하는 것이 도리는 아닌 듯하여.. 큰 맘(?) 먹고 치팅데이를 잡았다.

연말연시 고삐 풀려 자칫하면 도로아미타불(?) 될지도 모르는 위험한 12월에 차라리 빡시게 운동하자라고 마음먹고 11월 말에 간단히 저녁이나 하자 제안을 하였다.

하지만 이 분께서는(?) 절대 간단히 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1차는 국 룰인 고기에 국민 술인 소맥 열 잔(?)..

이때 계산을 했어야 했다.

그 보다 엉덩이가 의자에서 늦게 띄어진 찰나.. 계산을 하겠다는 나를 극구 말려 계산의 타이밍을 놓쳤다..

그 타이밍을 놓쳐서는 안 됐다....


본의 아니게 얻어먹게 되어 미안함과 쓸 때 없는(?) 자존심이 공존하며 내뱉은 한마디가 또 화근이었다.

"드시고 싶은 거 드세요"라는 한마디에 선뜻 앞장서 나가다가 발길이 멈춘 곳은 한눈에 봐도 비싸 보였다.

들어가 메뉴판을 보는 순간 쓰여있는 숫자들이 눈에 들어 올리는 만무하고 정신이 어지러웠다.

눈치가 맥주는 쳐다보지도 않는 거 같고 위스키 쪽으로 보고 있는 듯하여 결심하고 그의 결정에 따르기로 했다.


난생처음 마셔보는 이름도 어려운 위스키를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두병쯤 마셨을 때쯤 그가 졸고 있는 게 아니던가..

 결심을 한터라 저녁도 얻어먹었고 해서 결제를 하면서 영수증에 적힌 금액을 보며 눈물을 삼켰지만 왠지 형으로써, 거래처로써 자존심은 지킨 것만 같아..  자신과의 합의를 마치 그를 깨우고 나왔는데..

갑자기 멀쩡해진.. 좀비(?) 같은 신비한 능력을 가진 그는 3차는 자기가 사겠다며 언제나 그랬듯

"형님"을 남발하며 3차로 발길을 향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여기에서 끊어야만 했지만.. 그 형님이라는 소리에..

그걸 거절하면 왠지 쪼잔하고 못난 형처럼 보일 것 같아 그놈의 자존심이 또 한 번..


또 적지 않은 술값을 자랑하는 가게에 입성을 하였고 좀비 능력을 가진 그는 또 초반부는 멀쩡하게 달려댔다.

오랜만에 마시는 술과 독주에 나의 기억 또한 점차 희미해져 가고 있었고, 또 대망의 결제 타이밍만 남았더랬다


아.. 이때 희미해져 가는 기억의 정신줄이 잡아지더라..

3차를 내겠다던 인간은 또 뭔가 꿍꿍이를 보이는 듯한 모션을 취하고 있는 것이 눈에 확 들어오더라..

굳이 현금 이체를 해야 된다며 안 되는 휴대폰과 씨름을 하고 있더라.

시간도 절묘한 타이밍! 은행 서비스 점검 시간과 겹치는 시간이었다.

은행별로 시간대는 좀 상이하겠지만 그런 것까지 따질 상황도 아니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만감이 교차했다.

이 정도면 내가 호구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하지만 그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좀비가 아침이 되면 시들시들 해 지듯이 그도 갑자기 노안이라도 온 것 마냥 핸드폰을 눈앞에 딱 붙여 "왜 안되지?" 만을 연발하고 있었고, 그것을 기다리는 종업원 볼 면목도 없어 또 오지랖과 자존심이 발동했다.


일단 내가 계산을 하겠다고 해 버린 거..


그러고 집으로 돌아와 힘든 몸을 부여잡고 잠을 청했고 다음날 아침 일어나 자책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민망하고 그런 상황을 원래 견디지 못하기에 취중 상태에서는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속이 쓰린 게 어제 마신 독주 때문인지 돈 때문인지도 모르겠고 어제 하룻밤에 쓴 돈을 생각하니 무기력 해져만 갔다.

최근 3개월간 하루도 건너뛴 적 없던 운동도 하기가 싫었고 자존심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오지랖 피우다 폭망 한 나 자신을 자책했다.


아무렇지 않게 아침에 다시 연락 온 그는 "너무 좋은 술자리였다고.. 12월에 또 보잔다.."

고단수인 건지 순진무구한 건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고 짜증은 났지만..

또 쿨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있는 나에게 경의를(?) 표한다.   


자존심..

지금 이 상황을 자존심이라 칭해야 될지도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그게 맞는 표현인 것 같다.

소위 말하는 쪽팔리기 싫어서라는 게 자존심 때문이 아닌가 싶다.

직장인에게 82만원은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다.

저 돈 없다고 당장 굶는 것은 아니지만 속 쓰리고 아까운 금액인 것은 맞다.


하지만 오늘의 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몇 개월 동안 안 먹고 고생한 나한테 준 보상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제까지 헬창 코스프레였다면 오늘부터는 헬창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또 호구가 된 것 같느니 이러니 저리니 생각도 하지 않기로 했다.

20대였다면 그게 기분이 나빠 그거에 대해서 따져 물었겠지만 30대, 곧 40대를 바라보는 나는 그런 것에 감정 낭비하지 않기로 했다.

설령 그렇다한들 그냥 그런 인맥이라면 가차 없이 버려 버리면 된다 라는 위로를 해본다.


오늘부터 더 절제하고 저 금액만큼 헛된 지출을 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이렇게라도 생각해야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 같다.

자기 합리화도 잘만하면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자기 합리화 끝판왕!


아직 많은 세월을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삶이라는 것은 끊임없는 배움인 것 같다.

그때에 맞는 자기 가치관에 따라 자존심도 부려보았다가 비굴해지기도 하였다가 후회도 해보고 무언가를 얻는 경험도 해보고 아직 해보지 못한 경험에 대한 학습이 많이 남은 것 같다.


오늘도 난.. 한 수 더 배우고 그렇게 성장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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