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 자존심과 맞바꾼 돈
간혹 그런 날이 있다.
어쩔 수 없는 날.. 그럴 수밖에 없었던 날..
운동에 빠져 살던 요즘..
술도 마시지 않고 외출도 하지 않고 헬창은 아니지만 헬창 코스프레를 하며 나름 뿌듯한 삶을 살던 요즘..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회사 거래처 사장이 "형님.. 형님.." 하며 언제 술 한잔 하자는 제안을 자꾸 해왔다.
나보다는 어리지만 그래도 자꾸 거절하는 것이 도리는 아닌 듯하여.. 큰 맘(?) 먹고 치팅데이를 잡았다.
연말연시 고삐 풀려 자칫하면 도로아미타불(?) 될지도 모르는 위험한 12월에 차라리 빡시게 운동하자라고 마음먹고 11월 말에 간단히 저녁이나 하자 제안을 하였다.
하지만 이 분께서는(?) 절대 간단히 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1차는 국 룰인 고기에 국민 술인 소맥 열 잔(?)..
이때 계산을 했어야 했다.
그 보다 엉덩이가 의자에서 늦게 띄어진 찰나.. 계산을 하겠다는 나를 극구 말려 계산의 타이밍을 놓쳤다..
그 타이밍을 놓쳐서는 안 됐다....
본의 아니게 얻어먹게 되어 미안함과 쓸 때 없는(?) 자존심이 공존하며 내뱉은 한마디가 또 화근이었다.
"드시고 싶은 거 드세요"라는 한마디에 선뜻 앞장서 나가다가 발길이 멈춘 곳은 한눈에 봐도 비싸 보였다.
들어가 메뉴판을 보는 순간 쓰여있는 숫자들이 눈에 들어 올리는 만무하고 정신이 어지러웠다.
눈치가 맥주는 쳐다보지도 않는 거 같고 위스키 쪽으로 보고 있는 듯하여 결심하고 그의 결정에 따르기로 했다.
난생처음 마셔보는 이름도 어려운 위스키를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두병쯤 마셨을 때쯤 그가 졸고 있는 게 아니던가..
뭐 결심을 한터라 저녁도 얻어먹었고 해서 결제를 하면서 영수증에 적힌 금액을 보며 눈물을 삼켰지만 왠지 형으로써, 거래처로써 자존심은 지킨 것만 같아.. 나 자신과의 합의를 마치고 그를 깨우고 나왔는데..
갑자기 멀쩡해진.. 좀비(?) 같은 신비한 능력을 가진 그는 3차는 자기가 사겠다며 언제나 그랬듯
"형님"을 남발하며 3차로 발길을 향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여기에서 끊어야만 했지만.. 그 형님이라는 소리에..
그걸 거절하면 왠지 쪼잔하고 못난 형처럼 보일 것 같아 그놈의 자존심이 또 한 번..
또 적지 않은 술값을 자랑하는 가게에 입성을 하였고 좀비 능력을 가진 그는 또 초반부는 멀쩡하게 달려댔다.
오랜만에 마시는 술과 독주에 나의 기억 또한 점차 희미해져 가고 있었고, 또 대망의 결제 타이밍만 남았더랬다
아.. 이때 희미해져 가는 기억의 정신줄이 잡아지더라..
3차를 내겠다던 인간은 또 뭔가 꿍꿍이를 보이는 듯한 모션을 취하고 있는 것이 눈에 확 들어오더라..
굳이 현금 이체를 해야 된다며 안 되는 휴대폰과 씨름을 하고 있더라.
시간도 절묘한 타이밍! 은행 서비스 점검 시간과 겹치는 시간이었다.
은행별로 시간대는 좀 상이하겠지만 그런 것까지 따질 상황도 아니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만감이 교차했다.
이 정도면 내가 호구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하지만 그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좀비가 아침이 되면 시들시들 해 지듯이 그도 갑자기 노안이라도 온 것 마냥 핸드폰을 눈앞에 딱 붙여 "왜 안되지?" 만을 연발하고 있었고, 그것을 기다리는 종업원 볼 면목도 없어 또 오지랖과 자존심이 발동했다.
그러고 집으로 돌아와 힘든 몸을 부여잡고 잠을 청했고 다음날 아침 일어나 자책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민망하고 그런 상황을 원래 견디지 못하기에 취중 상태에서는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속이 쓰린 게 어제 마신 독주 때문인지 돈 때문인지도 모르겠고 어제 하룻밤에 쓴 돈을 생각하니 무기력 해져만 갔다.
최근 3개월간 하루도 건너뛴 적 없던 운동도 하기가 싫었고 자존심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오지랖 피우다 폭망 한 나 자신을 자책했다.
아무렇지 않게 아침에 다시 연락 온 그는 "너무 좋은 술자리였다고.. 12월에 또 보잔다.."
고단수인 건지 순진무구한 건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고 짜증은 났지만..
또 쿨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있는 나에게 경의를(?) 표한다.
지금 이 상황을 자존심이라 칭해야 될지도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그게 맞는 표현인 것 같다.
소위 말하는 쪽팔리기 싫어서라는 게 자존심 때문이 아닌가 싶다.
직장인에게 82만원은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다.
저 돈 없다고 당장 굶는 것은 아니지만 속 쓰리고 아까운 금액인 것은 맞다.
몇 개월 동안 안 먹고 고생한 나한테 준 보상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제까지 헬창 코스프레였다면 오늘부터는 헬창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또 호구가 된 것 같느니 이러니 저리니 생각도 하지 않기로 했다.
20대였다면 그게 기분이 나빠 그거에 대해서 따져 물었겠지만 30대, 곧 40대를 바라보는 나는 그런 것에 감정 낭비하지 않기로 했다.
설령 그렇다한들 그냥 그런 인맥이라면 가차 없이 버려 버리면 된다 라는 위로를 해본다.
오늘부터 더 절제하고 저 금액만큼 헛된 지출을 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이렇게라도 생각해야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 같다.
자기 합리화도 잘만하면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자기 합리화 끝판왕!
아직 많은 세월을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삶이라는 것은 끊임없는 배움인 것 같다.
그때에 맞는 자기 가치관에 따라 자존심도 부려보았다가 비굴해지기도 하였다가 후회도 해보고 무언가를 얻는 경험도 해보고 아직 해보지 못한 경험에 대한 학습이 많이 남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