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기다림 속에서, 나를 그리다

기다림으로 마주한 내면의 풍경

by HAN

오래된 핸드폰을 드디어 새것으로 바꾸었다.
데이터를 옮기는데, 생각보다 훨씬 긴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기다림을 참지 못해 곁에 있던 펜을 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은 선들,
그리고 보니 그 선들이 조용히 꺼내 보인 마음 같다.




가끔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림 하나 그리는 것으로 충분한 날이 있다.


기다리는 틈이었고,
생각은 많지 않았지만
손이 먼저 움직였다.
선이 이어지고,
표정도 없이 얼굴 하나가 그려졌다.


누군가 나를 조용히 바라보는 줄은
그때는 몰랐다.
그리고 나서야,
나는 그 사람 앞에서
빛 하나 꺼내어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람은
기다리는 동안
조용히 선을 그었다.


그림 속엔
얼굴이 하나 있었고

눈동자와 턱선,
입술선마다
익숙한 얼굴들이 스며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이 말없이 그리는 걸
말없이 바라봤다.


“시간이 있었으면
무지갯빛으로
옅게 칠했을 거예요.”
그냥, 지나가듯 말했다.


그 말이
자꾸 마음에 남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말 한 줄 안에
기억도,
감정도,
바람도
다 들어 있었다.


진하지 않게
덧칠하지도 않고
그저 빛이 스치듯
그 얼굴 위에
남고 싶었다는 말.


그 사람은
자기 얼굴을 그리면서
자기 안의 사람들을
하나하나
꺼내놓고 있었다.


그게 슬픈 일인지
고마운 일인지
나는 잘 몰랐지만,


그림 하나 속에
그 사람은
지금의 자신을
조용히 꺼내 놓았다.

얼굴 속의 사람들.jpg 얼굴 속의 사람들




핸드폰 데이터가 옮겨지는 동안,
어쩌면 저도 모르게 제 안의 깊은 생각과 감정들이
그림으로 옮겨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끔은 이렇게 말없이 펜을 쥐고
선을 긋는 행위가
가장 솔직하고 진정한 저를 마주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시 속에 담긴 얼굴처럼,
우리 모두의 내면에는
여러 ‘사람들’이 살고 있겠지요.


잠시 멈춰 서서

나만의 방식으로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

당신에게도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당신에게도
그림 한 장이면 충분했던 하루가
조용히 떠오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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