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먹물로 그린 삶의 풍경
눈밭사이
먼저 간 이의 발자국에
내 발을 얹는다
이렇게
걷다 보면
네게로 갈 수 있을까
덮어둔
그리움이
눈발 되어 흩날리고
인고의
시간도
허무함에 무너지는 밤
날지 못하는
병든
새처럼
그렇게
눈 위에
서있다.
몇 년 전, 아빠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을 때의 마음을 이곳에 남긴 적이 있다.
“난 너에게 사랑이고 싶다.”
그냥, 이 한 문장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날들이었다.
그때부터 약 1년여의 투병 끝에 아빠가 세상을 떠나시기까지의 시간을 기록한 글이
‘이별을 위한 동행’이다.
이 시는 그 안에 담겨있던 ‘눈이 덮인 날’ N행시다.
그때 아빠는 요양병원에 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집으로 돌아오고 싶어 하셨다.
그리움,
미안함,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
며칠 전 우연히 이 글을 다시 읽었다.
문장 사이사이,
우는 것밖에 할 수 없었던 그때의 내가 있다.
시 속에 남겨두었던 '발자국'이라는 단어가 마음을 잡았다.
마치 처음부터 계획했던 것처럼 도화지를 꺼냈다.
그 위에 내 발을 대고 본을 떴다.
흰빛을 채우고,
그 주위를 주홍빛과 노란빛으로 감싸 안았다.
다른 종이로 그 발자국을 찍어냈다.
그리고
아빠가 쓰시던 먹물을 뿌렸다.
누르고, 찍어내고,
종이를 거꾸로 들어 먹물이 흐르게 했다.
그렇게 삶의 발자국을 그렸다.
남은 먹물을 바라보다가
캘리그래피 종이를 꺼냈다.
붓을 들고
손이 가는 대로 그렸다.
아빠의 흔적과 나의 손길이 만나니,
우리네 삶을 닮은 세 가지 풍경이 펼쳐졌다.
새하얗고 입체적인 발자국 하나가
노란빛 속에 놓여 있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눈부시다.
망설임 없이 내딛는 첫 발,
주변을 채우는 환한 빛.
그때의 우리는 몰랐다.
이 발자국 위로
얼마나 많은 현실의 먹물이 떨어지게 될지.
하지만
그 순수한 시작이 있었기에
우리는 다음 걸음을 내딛는다.
빛나는 꿈 위로
현실의 먹물이 툭툭 떨어진다.
하지만 그 사이로
구름은 흐르고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친다.
모두가
각자의 일상을 살아간다.
먹물이 아까워 찍어낸 작은 점들이
어느새 우리가 딛고 서 있는
삶의 풍경이 된다.
마지막 먹물까지 쏟아부은 화면은
치열하다.
검은 선들이 소용돌이치며
발자국을 집어삼킬 듯 에워싼다.
그러나 그 어둠 속에서
나는 또 다른 모습을 본다.
누군가를
업고,
안고,
지탱하는 형체들.
마음이 새까맣게 타버린 날에도
아무 말 없이 등을 내어주는 존재.
그리고 그 중심에서
작은 주황빛이 피어난다.
모든 빛이 꺼진 것 같은 순간에도
끝내 남는 것.
그것은
함께 견디는 온기였다.
아빠가 돌아가실 즈음
나는 다짐했다.
아빠의 이름을
세상에 남겨주겠다고.
아빠는 새벽부터 밤까지
성실하게 일하셨지만
빛나는 삶을 살았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 애씀이
그저 허무 속에 묻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나는
아빠의 이름을 빛낼 방법을 몰랐다.
그래서 그 다짐은
오랫동안 숙제처럼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남은 먹물을 다 비우고 나서야 알았다.
먼저 간 이의 발자국에
내 발을 얹듯
아빠의 삶은
이미 내 안에 남아 있었다.
그 삶의 흔적이
지금의 나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빠의 삶은
허무하지 않았다.
그래서
굳이 이름을 크게 남기지 않아도 된다.
아빠처럼
성실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내면 된다.
그렇게 내 삶이 아름다운 풍경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