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달을 기억하는 사람 있는가?"
달은 나의 기도이고 인내이며 나의 희망이다.
창밖을 보며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4년 전, 복잡한 도시의 삶을 송두리째 내던지고 강원도 산골짜기로 들어오던 날,
나는 스스로를 '자발적 귀농인'이라 칭하며 뿌듯해했다. 도시에서 쌓아 올린 경력, 지위, 인간관계 그 모든 것을 부질없다며 헌신짝처럼 버렸다. 부산의 친구들은 여전히 나의 '용감한 이적'을 부러워하며 가끔 안부를 물어왔다. "강원도 공기는 좀 어떻노? 밤하늘 별은 여전히 쏟아질 듯 아름답나?"
처음 얼마간은 그랬다. 밤이면 머리 위로 쏟아지는 달과 별들을 보며 아이처럼 탄성을 질렀고, 새벽녘이면 허파꽈리 깊숙이 스며드는 무공해 공기에 감사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경작의 기쁨은 서툴렀지만 충만했다. 손수 키운 작물을 식탁에 올릴 때면, 그 어떤 도시의 미슐랭 식당도 부럽지 않았다. 삶은 단순했고, 명료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어젯밤 하늘에 달이 떠 있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별을 보며 감탄하던 것도, 맑은 공기에 감사하던 것도 아득한 옛일처럼 느껴졌다. 나의 공간은 분명 강원도였지만, 삶의 과정은 어느새 도시인의 그것으로 회귀하고 있었다.
새벽 일찍 일어나 밭으로 향하던 발걸음은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작업실을 떠나지 못하는 습관으로 바뀌었다. 도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쓸데없는 생각들이 나의 발목을 잡았고, ‘경작본능’은 점점 흐릿한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주변에 널린 무공해 자연은 당연한 배경이 되었고, 감사함은 무뎌졌다.
스트레스라는 단어는 다시 나의 일상을 잠식하기 시작했고 편두통이 찾아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불규칙한 식습관, 부족한 수면, 그리고 보이지 않는 압박감.
‘적당한 스트레스는 정신 건강에 좋다’는 말을 위안 삼았지만, 정작 그 수치를 측정할 방법도, 의지도 없었다. 스트레스의 원인을 외부로 돌리며 책망하고 원망하는 사이, 나의 신체 리듬은 여지없이 파괴되고 있었던 거다.
얼마 전 건강검진을 위해 찾은 병원. 결과는 나에게 적색경보를 울렸다. 높아진 혈압, 망가진 간수치. 의사는 생활 습관 개선이 시급하다고 경고했다. 동네분들 사귄다는 핑계로 잦은 술자리, 오래전 잊힌 다짐, 오만한 게으름이 문제였을 것이다. 나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놀란 마음에 황급히 ‘바른길’을 찾으려 했지만, 한번 흐트러진 몸과 마음은 성취욕의 충동처럼 빠르게 돌아오지 않았다. 마치 오랜 시간 잘못된 자세로 굳어져버린 몸을 교정하듯, 더디고 고통스러운 과정이 필요해 보였다.
나는 깨달았다. 아무리 자연이 곁에 있고 무공해가 널려 있다 한들, 그것을 잊고 산다면 자신이 있는 곳은 아황산가스와 일산화탄소가 가득한 도심의 교통체증 한복판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이나 원인은 늘 그 자리에 멀쩡히 있는데, 오롯이 자신만이 그 스트레스를 100% 흡수하며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단순한 논리를 나는 4년 동안 까맣게 잊고 살았다.
늦은 오후, 나는 오랜만에 밭둑에 걸터앉았다. 저 멀리 능선 위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천천히 흐르는 바람이 고무줄로 묶은 꽁지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마치 잊고 살던 시골의 자연이 나에게 나지막이 속삭이는 듯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주변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꾸는 것이다."
그랬다. 환경을 탓하고, 남을 탓하고, 세상을 탓하는 동안 정작 변해야 할 사람은 자기 자신임을 나는 외면해 왔다. 도시를 떠나온 육체와 달리, 나의 정신은 여전히 도시의 불안 속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나는 한숨 섞인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흙냄새와 풀 내음이 나의 허파를 다시 가득 채웠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하늘에는 어느새 하나둘 별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직 달은 보이지 않았지만 오늘 밤에는 분명 달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내일 아침, 나는 어제의 달을 분명히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중얼거렸다. 4년 전 처음 이곳에 왔을 때처럼, 자연에 온전히 나를 맡겨보기로 했다. 몸과 마음의 치유는 더딜지라도, 조급해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자연의 시간에 맞춰 천천히 나아가기로. 가장 먼저, 내일 새벽 일찍 일어나 주변을 한 바퀴 돌면서 살피기로 마음먹었다. 어쩌면 그곳에서, 나는 잊고 지냈던 진짜 ‘자신’과 마주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어제의 달뿐 아니라, 어제의 별과 내일의 햇살까지도 가슴 깊이 기억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다시 다짐한다.
내 아이들이 저녁 먹자고 보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