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초록날다

흙 캔버스에 그려진 가을

초록선물

by 종호날다


홍천의 늦가을은 쌀쌀했지만, 지나는 바람결에는 여전히 흙냄새와 싱싱한 농작물의 기운이 배어 있었다. 18년 차 귀농인인 나는 밭둑에 앉아 멀리 읍내로 향하는 포터 트럭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저 트럭 안에는 분명 동네 아주머니들 몇 분이 옹기종기 앉아 있을 터였다.

그중에서도 유독 내 눈길을 끄는 건, 밑에 집 형수님이었다. 봄부터 여름 내내 그녀의 모습은 늘 한결같았다. 몸빼 바지에 너슬너슬한 웃옷 차림. 햇볕에 그을려 거뭇해진 손등에는 굳은살이 박여 있었고, 흙 묻은 신발은 발바닥만큼이나 땅에 단단히 붙어 있는 듯했다. 그 모습은 '시골 주부'라는 단어의 살아있는 정의였다. 농산물 하나라도 더 좋은 값에 팔기 위해, 그녀는 해 뜨는 것부터 해 지는 것까지 오로지 밭일과 씨름했다. 풀 한 포기라도 더 뽑고, 열매 하나라도 더 튼실하게 키우려는 그녀의 억척스러움은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그렇게 늦가을 가을걷이가 끝나고 나면, 그녀에게도 아주 잠깐의 여유가 찾아왔다. 그리고 그 여유의 정점은 바로 '읍내 가는 날'이었다. 며칠 전부터 마치 소풍 가는 아이처럼 들떠 있던 밑에 집 형수님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리고 오늘, 그녀는 여느 때와 다른 옷차림으로 나타났다. 밭일할 때 입던 몸빼 대신, 검은색 면바지에 제법 깔끔한 니트를 받쳐 입고 있었다. 물론 그 옷들도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빛바랜 것이었지만, 밭에서 보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결정적인 건 얼굴이었다. 평소 거울 볼 시간조차 없었던 그녀의 얼굴에는 하얗게 분이 발라져 있었고, 입술에는 선명한 붉은 립스틱이 곱게 칠해져 있었다. 마치 흙투성이 캔버스 위에 피어난 한 송이 꽃처럼, 그 화장은 그녀의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아이구, 형수님~ 오늘 어디 잔치 가는가 봐예?"

내가 너스레를 떨자, 형수님은 수줍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무슨 잔치요.. 읍내 장 보러 가는 거지. 이왕 가는 김에 사람 몰골은 하고 가야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포터 트럭 운전석에 올라탔다. 덜컹거리는 트럭이 먼지를 일으키며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흙먼지 속에서도 그녀의 붉은 입술만은 유난히 선명하게 포터 뒷문에 새겨져 있다.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귀농 18년 차, 이제는 농촌의 모든 풍경이 익숙하고 자연스럽다 생각했다. 하지만 마을 형수님의 오늘 모습은 왠지 모르게 재미있고 또 아름다웠다. 농사일의 고단함 속에서도 잊지 않는 작은 행복, 자신을 가꾸려는 소박한 마음이 담겨 있는 듯했다. 포터 트럭에 실린, 흙먼지 속에서도 빛나는 그녀의 붉은 입술이 오늘따라 유난히 붉었다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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