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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사람, 새

46산 보성 오봉산 (2022년 1월)

by Claireyoonlee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뜨뜻한 아랫목이 생각난다. 지글지글 끓는 구들장이 거의 사라진 요즘은 더 간절하다. 아무리 세찬 바람을 맞아도 집에 와서 요 밑에 들어가면 꽁꽁 얼었던 몸이 스르르 녹았다.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 기분 좋은 온기를 거부할 수 없었다. 몸은 더워지지만, 코가 시린 웃바람이 머리를 맑게 해서 좋았다. 외할머니댁 아랫목에 깔아 놓은 이불 밑에는 내가 먹을 밥이 스테인리스 그릇에 담겨 있었다. 밥은 할머니 품처럼 알맞게 따뜻했다. 아랫목에서 콩이 발효되면서 풍기는 쿰쿰한 냄새는 싫었지만, 청국장찌개는 잘 먹었다. 우리가 어릴 때는 구들장 덕분에 겨울이 따뜻했다.

온돌을 우리말로 구들이라고 한다. 장작이나 연탄을 때서 아궁이에 걸린 솥을 데우고 그 열기가 고래를 빠져나가 구들장을 뜨겁게 만들어 방을 덥히는 난방 시스템이다. 열기를 오래 간직하는 돌로 잘 만든 온돌방은 겨우내 따뜻하다. 전남 보성의 오봉산에는 구들의 재료가 되는 방돌이 무궁무진하다. 돌을 운반하는 소달구지가 다녔던 갈지(之)자 모양의 길이 아직도 산에 남아있다. 고려 말기 온돌이 발명되어 그 후로 아주 최근까지 꽤 많이 내다 팔았을 텐데 아직도 돌은 돌처럼 흔하다. 보일러와 아파트 주거 문화로 이제는 쓸모없어진 돌은 76개의 탑으로 올라갔고, 바닥에 깔려서 산길이 되었다. 보성군은 2022년 이곳을 ‘제833호 국가등록문화재’로 이름을 올렸다.


오봉산에는 이름 그대로 다섯 개의 봉우리가 솟아있다. 득량남초등학교에서 시작하는 첫 번째 봉우리를 향한 오르막 급경사를 조금만 올라가면 벌써 네모반듯한 논과 잔잔한 바다가 보였다. 나는 표현이 야단스러운 친구가 내뱉는 감탄사에 웃으면서 경치가 ‘대박’임에 동감했다. 바다를 채워 만든 경작지와 수평선의 정확한 직선의 도형은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 회화 같았다. 논에는 벼를 모종하기 전 심은 보리가 푸릇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이파리가 몽땅 떨어져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득량만과 팔영산 같은 바다 건넛마을의 풍경이 훤히 보였다. 능선길 위에는 드문드문 세워진 돌탑이 묵묵히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탑은 틈이 없이 정교하고 적당히 살집이 있어 태풍에도 쓰러지지 않을 것처럼 단단해 보였다.


오봉산은 높지 않지만, 다섯 개의 봉우리를 넘어 정상(343.5m)까지 가는 길이 꽤 멀다. (5.9km) 가파른 오르막길에는 납작한 돌이 층층이 쌓여 발을 디딜 때 가끔 위태롭게 흔들렸다. 숨이 가쁘면 고개를 들어 자지러지게 반짝이며 하늘을 거울처럼 비추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남쪽 나라의 훈훈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땀을 식혀 주었다.

잠시 길을 혼동하였는데 대장이 금방 길을 찾아 우리는 동요 없이 그를 따랐다. 이순신 장군을 따르는 백성들처럼.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이끄는 수군은 왜군에게 대패했다. 이순신 장군은 백의종군에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다. 전쟁 물자와 전함을 준비하고 나니 수군이 필요했다. 한 장수가 오봉산 칼바위에 100명 이상의 백성이 숨어있다고 말했다. 그들을 기반으로 명량대전에서 13척의 배로 왜군의 133척의 배를 물리칠 수 있었다. 하늘을 향해 뾰족한 날을 무시무시하게 치켜세운 바로 그 칼바위가 보였다. 우리는 칼바위 밑의 동굴에 들어갔다. 100명 이상의 사람이 기거할 만큼 넓었다. 커다란 바위 서너 개가 만든 뾰족한 지붕 아래는 아늑하고 알 수 없이 좋은 기운이 감돌았다. 바위틈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 밑에서 우리는 인디아나 존스처럼 동굴을 탐험했다.


풍혈지에서는 겨울에도 더운 바람이 나온다. 오랫동안 열을 품을 수 있어 구들장이 되는 돌(점판암)이 내뿜는 온기라고 했다. 한겨울에도 고사리가 자란다는 돌무더기 속에 다가가니 갑자기 훅하고 더운 바람이 나와 놀랐다. 오봉산 정상 가는 길에는 쉬지 않고 신기한 볼거리가 나타났다. 마지막 봉우리에 도착했을 때 나는 산을 떠나기가 아쉬웠다.


짧은 하산길에는 시냇물이 흘렀고 돌 위에 야자 매트가 깔려 걷기 편했다. 산에서 내려온 물은 마을에 넓은 저수지를 만들었다. 우리는 해평 저수지 옆길을 따라 걸으며 해남의 겨울 오후의 볕을 즐겼다. 철새 떼가 윤슬 위에서 흔들거리며 새까맣게 떠 있었다. 이제는 산을 같이 다니는 친구들이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누가 걸음이 빠른지, 누가 잘 넘어지는지, 사진을 찍을 때 어떤 포즈로 찍는지까지 말하지 않아도 안다. 오랜 비행을 함께 하는 철새들도 서로를 잘 알고 있을까. 자연 속에서 사람은 새와 별로 다르지 않아 보였다.

따뜻한 돌의 기운을 흠뻑 받아서인가 잠을 자지 못하는 옆자리의 친구에게 미안하도록 귀경하는 내내 잤다. 얕은 잠의 언저리에서 아기자기한 남쪽의 산과 바다, 새가 어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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