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산 인왕산 (2022년 1월)
인왕산은 우리 집 뒷산이다. 옛날에는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가 있나”라는 속담이 있을 만큼 거친 암산이었고, 지금 보아도 기세가 강해서 만만하게 볼 동네 산은 아니다. 하지만 도심 안에 있고 길을 잘 정비해서 이제는 누구나 가볍게 오를 수 있다. 한양도성을 끼고 뻗은 산길에는 근사한 조명이 밤을 밝힌다. 해가 뉘엿뉘엿 지면 은은한 LED 불빛이 도성의 돌담을 비추어 인왕산에는 노란 이무기가 기어 올라가는 것 같다.
최근 모교를 방문했을 때 학교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인왕산을 발견했다. 학교에 다닐 때는 그 산을 바라볼 틈이 없었다. 그때도 저 산이 있었나 의심이 들 만큼 산을 본 기억이 없다. 호랑이가 살았던 산의 기운이 학교에 팔팔하게 퍼지고 있었다. 그 덕분일까. 근처의 시내 중고등학교는 거의 모두 이사했는데 우리 학교는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겸재는 인왕산 근처에서 오래 살았다. 나는 코 앞에 있는 산을 보지 못하고 몇 년을 보냈는데 그는 인왕산을 유심히 보고 본 대로 그렸다. 관념 산수화가 대세였던 시대에 진경산수화를 처음으로 그렸다고 하지만, 그는 그저 어릴 때부터 본 산을 본 대로, 느낀 대로 표현했을 뿐이다. 평생 절친인 사천 이병연이 쾌차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린 인왕제색도에는 운무 사이로 범바위, 코끼리바위, 치마바위, 기차바위, 부침바위, 한양도성이 선명하게 보인다. 몇백 년이 흘러도 바위와 돌담에는 서슬 퍼런 위엄이 서려 있다.
높지 않은 정상(338m)에서 북쪽으로 북한산 최고봉 백운대까지 보이고, 바로 옆에 있는 북악산 밑 청와대의 푸른 지붕은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인다. 청와대와 마주 보고 있는 경복궁의 처마는 하늘로 날아갈 것같이 날렵하다. 청운동, 효자동, 통의동의 집은 나지막하다. 청와대와 궁 근처라서 건물에 고도 제한이 있기 때문이다. 그 마을을 벗어나면 마천루가 키를 경쟁하듯 높이 솟아있다. 수많은 사람의 희로애락과 사랑하고, 헤어지는 사람들의 에너지가 거칠게 올라오지만, 산은 그보다 더 강렬한 기운으로 이를 압도한다.
오늘은 새해 첫날은 아니지만, 일출을 보고 한 해의 다짐을 하고자 인왕산에 올랐다. 새벽에 소리 없이 내린 눈으로 산은 군데군데 하얬다. 바위에 튼튼하게 박힌 철제 계단과 지지대를 잡고 미끄러운 길을 올라가느라 숨이 살짝 가빴다. 일출을 보려고 새벽부터 올라와 해가 뜨기를 기다리고 있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아쉽게도 구름과 먼지에 가려 붉은 태양을 볼 수는 없었다. 눈을 맞아 지붕이 하얀 집과 희끗희끗한 암벽이 흐린 하늘을 이고 고요한 휴일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경박하고 시끄러운 도심에 아랑곳하지 않고 산은 오래전부터 그래왔듯이 신성하고 기백이 넘친다. 앞서 지나간 등산객의 잦은 발자국으로 반들반들해진 바위가 미끄러워 발에 힘을 꽉 주었다. 정상에서 어렴풋하게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 하늘이 보였다. 천만의 도시는 서서히 깨어나 청회색 빛으로 밝아졌다. 며칠 전 본 충북 알프스의 굽이굽이 이어진 능선과 비교할 수 없지만, 대도시 건물과 600년 도읍을 둘러싼 산은 유려하고 친숙하게 연결되어 있다.
윤동주 문학관까지 한양도성을 따라 이어지는 내리막은 계단이 되어있어 편하다. 내려가는 중간에 인왕산 둘레길로 내려가는 내리막이 몇 군데 있다. 나는 뿌리가 이어져 서로를 지탱하고 있는 부부 소나무를 지나면 바로 보이는 계단으로 내려갔다.
인왕산 둘레길 중간쯤에는 전망 좋은 북카페 《인왕산 초소책방 더숲II》이 있다. 서울 시내가 훤히 보이는 길 중간에 생뚱맞게 2층 건물이 올라갈 때 무엇이 생기는가 하고 관심 있게 지켜보았었다. 어느 날 보니, 수도 방위를 하느라 삼엄했던 초소가 인왕산과 어울리는 정자 같은 쉼터가 되었다. 시내 한복판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게 어디에 앉아도 자연과 가깝다. 대형 서점에서 팔지 않는 환경에 관한 책을 전시, 판매하고 유기농 밀가루로 구운 빵의 향기와 맛은 하산하여 출출할 때 도저히 거부할 수 없다. 거품이 부드러운 플랫 화이트와 소금 크루아상을 먹어 가벼운 등산으로 소비한 열량을 죄의식 없이 보충했다. 산 중턱의 공기는 먼지 때문에 알싸해도 도시에서 들이마실 수 있는 최선의 들숨, 날숨이다.
수성 계곡으로 내려와 겸재의 시선으로 다시 한번 산을 올려다보았다. 5백 년 전의 화가가 그린 산과 내가 보는 산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산의 정취에 취해 상기된 그림 속의 다정한 두 친구와 나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내가 추천하는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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