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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기회는 놓치면 안된다

43산 계방산(2021년 12월)

by Claireyoonlee

성탄일에 강추위가 몰려온다는 기상청 문자가 핸드폰에 계속 떴다. 강원도에는 폭설이 내리니 여행을 계획한 사람은 포기하라는 문자의 어조가 은근하게 위협적이어서 평창 쪽의 산 두 개를 넘는 원래의 산행 계획을 취소했다. 아쉬워하는 참에 한 친구가 직접 운전해서 계방산에 올라갔다가 원점 회귀하는 코스로 다녀오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산꾼이라면 어떻게 눈이 막 내린 산을 편하게 갈 기회를 놓치겠는가. 기록적인 강추위는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면 견딜 수 있다.


산에서 사고가 났다고 하는 뉴스는 특히 겨울에 많다. 겨울의 산은 혹독하고 매정하다. 산 밑이 영상일 때도 정상의 기온이 얼마나 낮은지는 상상할 수 없다. 가볍게 올라갔다가 추워서 벌벌 떨다가 숨 막히는 경치를 감상하지도 못하고 서둘러 내려온 적도 있다. 지나치게 껴입으면 옷의 무게에 지친다. 단단히 준비하기 위해 온라인에서 겨울 산행 복장에 대한 수많은 정보를 읽고 고민했다.


경사를 오르다 보면 아무리 추워도 열이 난다. 땀이 나도 금방 말라야 하니 절대 면으로 된 속옷은 안 된다. 도중에 웃옷을 벗어도 민망하지 않을 적당한 나이론 속옷을 입는 것이 좋다. 그 위에 보온이 되는 플리스로 된 집업(더우면 지퍼를 내려서 바람이 들어오게) 셔츠를 입고 얇은 다운 소재의 조끼나 점퍼를 입는다. 마지막에 방풍 재킷을 입어 바람을 막는다.


사실 겨울 산행할 때 손이 제일 춥다. 얇은 장갑을 끼고 그 위에 고어텍스로 된 두툼한 장갑을 낀다. 핫팩을 두어 개 소지하고 있다가 언 손끝을 녹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동상에 걸릴 수도 있다. 귀마개가 있는 방수 털모자가 눈에 젖지 않아 좋다. 양말도 얇은 것, 두꺼운 것 두 개를 신는다. 신발에 눈이 들어오지 않도록 하는 스패츠와 신발에 끼는 아이젠은 겨울 눈 산행에는 기본이다.


기상청의 겁나는 예보와 달리 우리가 가려는 계방산 기온은 영하 12도 정도로 올랐다. 눈도 오지 않는다고 했다. 예보에 지레 겁을 먹은 사람들은 강원도 여행을 포기했는지 고속도로에 차가 씽씽 달렸다. 동쪽으로 가면서 산은 점점 하얗게 변해가고, 태양이 붉고 맑게 떠올라 우리는 하얀 성탄을 보낼 기대에 찼다.


1,000m 고지의 운두령에는 벌써 주차한 차가 많았다. 등산로 초입부터 상고대가 산을 꽉 채워 비쩍 마른 모든 겨울나무는 금광석처럼 빛났다. 눈꽃은 영하의 공기 중에도 얼지 않은 물이 찬 나뭇가지와 만나 순식간에 얼어서 생긴다. 무미건조한 겨울 산을 오르는 산꾼들에게 눈꽃은 귀한 선물이다. 우리는 크리스털처럼 영롱하게 반짝이는 나무를 보며 천 미터 아래의 세상을 잊었다. 산은 눈을 받아들여 관능적인 곡선을 요염하게 드러냈다. 평지와 오르막이 번갈아 나오는 눈길은 푹신하고, 먼저 올라간 사람들이 길을 다져놓고 더 이상 눈이 쌓이지 않아 선명하게 이어졌다. 아이젠으로 무장한 신발로 한 발짝 디딜 때마다 그릇에 남은 물기를 닦을 때처럼 뽀드득 뽀드득 소리가 났다. 숨을 고르며 가끔 올려다보면 새파란 하늘과 새하얀 산의 대비가 눈이 부시도록 뚜렷했다.


1,577m 높이의 계방산 정상에 드디어 올랐다. 하얗게 끝없이 이어진 높은 산들이 한꺼번에 밀려와 눈이 부셨다. 산은 강추위와 폭설을 받아들여 당당하고 고귀했다. 조금만 추워도 호들갑을 떠는 인간 세계는 얼마나 경박한가. 눈이 덮인 겨울 산 정상에는 신성한 기운이 흘렀다.


전망대에서, 굽이굽이 이어지는 오대산 자락을 보고 한 친구가 “백호의 등줄기가 눈에 삼삼하다”라고 했다. 금방이라도 깨어나 포효할 듯한 거대한 백호가 거기 웅크리고 있었다. 우리는 두 번은 보기 어려운 산 위 설경을 눈에 담고, 카메라에 담아 보고, 눈에 또 담았다.


산에서 내려오는데 상고대가 녹아 바람이 불 때마다 얼굴에 떨어졌다. 솜털 같은 눈발이 얼굴에 닿아 스르르 녹으면 깨끗한 물로 세수하는 것처럼 상쾌했다. 햇볕이 따사로웠고 바람은 적당해 강추위라는 예보가 믿기지 않았다. 우리는 즉흥적인 산행 계획이 예상보다 더 성공적이었음을 자축하며 감사했다. 돌아오는 길에 봉평에서 먹은 메밀국수와 친구들과의 유쾌한 대화는 산행의 시간을 행복으로 조금 더 채웠다. 산에 갈 기회가 생기면 마다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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