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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지 않은 다도해의 섬

41산 거금도와 연홍도 (2021년 11월)

by Claireyoonlee

일출 직전의 새벽은 한밤보다 더 캄캄하다. 한때는 섬이었지만 다리가 생겨 이제는 섬도 육지도 아닌 거금도의 들머리 동정마을에 도착했을 때, 누군가 하늘을 보라고 했다. 멜리 다이아몬드를 쫙 뿌려놓은 검푸른 융단이 하늘에 펼쳐져 있었다. 건드리면 툭툭 떨어질 듯 별이 선명했다. 닭도 아직 잠들어 있는 고요한 마을을 방해하지 않으려 살금살금 걸었다. 우리는 새벽의 짙은 어둠을 랜턴으로 깨면서 거금도의 가장 높은 봉우리 적대봉(592m)을 향해 올라갔다.


버스에서 선잠에 빠져서도 참 구불구불한 산길을 달린다고 생각했었다. 가파른 길을 올라와 숨을 고르며 보니, 바다를 밝히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소록대교의 뒤편 산세가 험했다. 우리가 지나온 산이었다. 이른 새벽이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태양이 영영 떠오르지 않을 것 같았다. 서로의 랜턴 빛에 의지하여 낙엽이 수북하게 쌓인 산길을 한 발 한 발 힘겹게 옮겼다.


서서히 하늘이 푸르게 변하면서 날은 어김없이 밝아왔다. 태양이 떠오르면서 인공의 빛을 누르고 하늘에 시시각각 다른 모습을 연출했다. 잠을 설쳐야만 볼 수 있는 남쪽 끝 다도해의 박명과 해돋이를 우리는 숨죽이고 바라보았다. 맑고 푸른 하루를 미리 보여주듯이 태양은 벌떡 일어나 환하게 하늘을 밝혔고 바다를 깨웠다. 여러 개의 섬이 부드러운 능선으로 이어진 바다가 조명받은 무대처럼 떠올랐다.


적대봉에 있는 봉화대 주위에는 촘촘하게 돌담을 쌓아 올렸다. 그 안에 들어가니 아늑했다. 여기서 불을 피워 왜적의 침략을 알렸던가. 유일하게 원형이 남은 조선시대의 봉화대는 이제 쓸모가 없어졌지만, 과거의 위엄을 잃지 않고 섬의 꼭대기를 지키고 있었다. 능선으로 내려와서 뒤돌아보니 봉화대가 아주 작게 보이고 철새가 일사분란하게 대열을 맞추어 날았다. 왜 저 새들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날아갈까 궁금해하며 우리는 새들의 편대비행을 한참 바라보았다.


아침의 싱싱한 햇볕이 바다 위로 미끄러져 수평선까지 길게 황금빛 길이 이어졌다. 우리는 바람이 없는 곳을 찾아 앉아 물을 끓여 컵라면을 먹었다. 캄캄한 새벽부터 쉬지 않고 걸어와 시장해서 조미료가 많이 든 뜨끈한 국물로 속을 만족스럽게 채웠다. 겨울 산행에는 컵라면이 최고라는 산꾼들이 말이 맞았다. 바다가 양옆으로 펼쳐진 능선에는 바람도 멎었고 태양이 따뜻하게 내리쬐어 언제까지나 앉아 있고 싶었다. 산행을 즐기기 위해 날씨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어둠을 뚫고 올라갔는데 안개만 본다던가, 바람이 몰아치면 얼른 하산하고 싶다. 섬산의 능선에서 늦가을의 햇볕이 등을 따스하게 덥혀주고, 힘차게 걸어 맺힌 땀을 적당한 바람이 식혀 주었다. 게다가 맑은 햇볕이 비추는 다도해를 온종일 보았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산행 날씨였다.


거금도는 우리나라의 3,000여 개의 섬 중에 열한 번째로 큰 섬이다. 들머리 동정마을에서 ‘고래 등처럼 솟아오른’ 적대봉을 올라 날 머리 서촌마을까지 5시간이 걸렸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해풍을 맞고 외로이 자란 나무들은 곱게 물들어 숲은 한껏 부풀어 올랐다. 산길에 수북하게 쌓인 낙엽을 누군가 세심하게 돌봐서 산꾼이 헤맬 일은 없었다.


거금도의 서쪽 끝 신양 선착장에는 아기자기하게 꾸민 작은 배가 연홍도로 5분마다 떠난다. 마을 전체가 미술관이라는 연홍도를 한 바퀴 도는데 한두 시간 정도 걸린다. 마을의 낮은 담장을 따라가면서 작은 소품이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몽돌 해변에도 ‘인어 아가씨’ 같은 조형물이 있다. 파도가 몽돌 사이를 빠져가며 차르르 소리를 냈다. 우리는 바닷가 바위 위에 앉아 시원한 맥주를 마셨다. 건너편의 섬 금당도의 기암괴석이 무시무시해 보였다.


연홍도의 마을 주민 어르신들은 모두 전동차를 타고 어디론가 다녔다. 담벼락에 동네 사람들의 사진이 잔뜩 붙어 있는 집에서 할머니가 나오길래 "할머니 사진도 여기에 있어요?"하고 물었다.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방인에게 관심이 없는지 말도 없이 전동차를 타고 휙 가 버렸다. 수많은 사진 속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작은 섬의 이야기가 빼곡하게 들어있었다.


귀경하는 버스 차창 밖으로 새벽의 어둠을 뚫고 올 때는 보지 못했던 남쪽 지방의 풍경이 석양을 배경으로 화려하게 펼쳐졌다. 다리로 연결된 혹은 연결되지 않은 섬들이 납작한 집을 품고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섬은 외롭다고 하지만, 다도해의 섬들은 외롭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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