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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하는 삶

40산 홍천 삼봉 구룡령, 갈전곡봉, 가칠봉( 2021년 11월)

by Claireyoonlee

다 내주었던 나무는 겨울을 앞두고 냉혹해진다. 낮이 짧아지고 찬 바람이 불면 성장을 멈추고, 양분을 만드는 광합성이 줄어든다. 알알이 맺혀있던 잎사귀는 광합성을 하는 엽록소가 사라져 그동안 숨어있던 색이 드러나거나 새로운 색을 만든다. 노랑이나 주황은 여름에는 가려져 있는 색이고, 빨강이나 보라는 새로 만들어지는 색이며, 떫은맛은 갈색이다. 이때 낮과 밤의 기온차이나 일조량이 영향을 준다. 결국 나무는 잎자루 부분을 만들어 양분 공급을 차단해 매몰차게 잎과 이별한다. 그래야 추운 겨울을 날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적인 사실을 알고 나면 가을에 형형색색으로 물드는 나무를 보고 편하지는 않지만, 그 숭고한 순종의 결실은 아름답기만 하다. 하지만 소요산에 이어 이번 가을 산행에서도 단풍 보기가 쉽지 않았다. 홍천 구룡령 해발 1,000m가 넘는 들머리에서 시작해 백두대간 27구간의 봉우리 갈전곡봉을 올랐다가 삼봉 휴양림으로 내려오는 내내 나무는 벌써 잎을 떠나보내거나 아직 초록이었다. 기후 변화를 자초한 인간에게 나무는 화가 난 것일까.


뾰족한 돌을 가리고 있는 두둑한 낙엽 더미를 조심스럽게 밟으며 걸었다. 여러 개의 봉우리를 오르고 내리는 길에서 비구름 속을 헤쳐가거나, 구름 사이로 나오는 햇빛을 받거나, 후드득 소리 내며 떨어지는 우박도 맞았다. 겨울이 온다고 잔뜩 긴장한 나무만이 고요히 숨을 쉴 뿐, 인적이 드물었다. 나무는 언제 이렇게 모든 잎을 떨구고 겨울 채비를 한 것일까. 낙엽을 밟을 때마다 나는 바스락 소리를 들으며 나는 지나간 모든 시간을 아쉬워했다.


가끔 흩어진 구름 사이로 멀리 양양의 바다와 누렇게 변한 산의 굴곡이 보였다. 하늘과 바다, 산이 파도처럼 굽이쳐 밀려왔다. 우리는 비옷을 입었다가 벗었다가 하면서 깊어 가는 가을의 산을 오르고 내려갔다. 구룡령, 갈전곡봉, 오르는 경사가 급하다고 ‘까칠봉’이라 부르는 가칠봉을 차례로 오르고 실론 계곡을 통과해 내려오니 삼봉 휴양림이었다. 시간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지름길이라고 급경사 내리막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젖은 낙엽이 깔린 급한 경사로 내려오면 넘어지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돌아서 내려갈 때는 싱싱한 초록색의 이끼가 나무와 돌에 퍼져있는 계곡을 지나갔다. 햇볕은 나뭇가지 사이로 부드럽게 흘러 들어오고 공기는 물을 잔뜩 머금어 메마른 산과는 다른 세상이었다. 이끼는 오래된 바위와 죽어 쓰러진 나무를 이불처럼 부드럽게 덮었다. 이끼를 달래며 흐르는 계곡물 소리가 잔잔했다. 우리는 갑자기 나타난 따스한 계곡에서 코앞에 다가온 겨울을 잊었다.


세 봉우리를 감싸는 구름을 품고 이끼를 더듬으면서 흘러간 물은 삼봉 약수의 원천이 된다. 강원도의 공기처럼 톡 쏘게 시원하고, 철분이 들어가 쇠 맛이 났다. 무쇠 같은 봉우리를 오르지 않았다면, 오아시스 같은 신비한 계곡을 보지 않았더라면 물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철분과 탄산이 풍부한 약수를 실컷 마시고 커다란 물병에 욕심껏 담았다. 제멋대로 변하는 날씨와, 단풍이 들어보지도 못하고 벌거벗은 나무, 바짝 말라 등산길을 덮어버린 낙엽, 그리고 계곡을 덮은 이끼가 살아 온 시간을 모두 간직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서.

알록달록한 단풍이 든 가을 산을 기대하며 멀리 갔지만, 이끼가 새싹처럼 솟아난 계곡을 보고 건강한 물을 마셨다. 기대한다는 것은, 실망과 함께 기대하지 않았던 또 다른 선물이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다. 실망할까 두려워도 늘 무언가를 준비하며 기대하는 일상을 살아야 할 이유를 단풍이 귀한 가을 산에서 찾았다. 그래도 내년에는 산마다 시련을 아름다움으로 승화한 나무가 빼곡하게 들어차기를!


홍천 삼봉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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