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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뭐길래

39산 소요산(2021년 10월)

by Claireyoonlee

소요산은 동두천시에 있다. 1호선을 탔는데 소요산역까지 가지 않아서 동두천역에서 내려 택시를 탔다. 차창 밖 거리에는 인적이 없고 상점은 거의 문을 닫아 을씨년스러웠다. 기사에게 동네가 참 삭막하다고 말했더니 이곳은 미군을 상대하는 사창가였고, 지금은 집값이 싸서 서울 집을 팔고 온 은퇴한 노인들이 산다고 했다. 그들의 빈 주머니를 위해서 술집에서는 막걸리를 병이 아니라 사발로 판다고 말했다. 한 병의 막걸리를 사 먹을 형편이 되지 않아 한 사발만 마시는 가난한 노인처럼 소요산으로 가는 길은 쓸쓸했다.


사막 같은 도시를 벗어나 도착한 소요산은 오아시스같이 생명력이 넘쳤다. 산은 꽤 높고(536미터) 100대 명산 중 하나이다. 올해 가을에는 단풍이 제 색을 내지 못해 아직 푸르거나 말라 시들어버렸지만, 거의 매년 붉고 노란 아기 단풍나무가 들머리부터 장관을 이룬다. 늘 풍성한 계곡물은 시원한 폭포로 떨어진다. 우리는 인파가 덜한 3코스로 걸었다.(일주문-자재암-백운대-중백운대-상백운대-칼바위-나한대-의상대-공주봉-구절터-일주문)


가을 산에 가면 나무는 당연히 꽃같이 물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후가 적당하지 않으면 나무는 화려한 중년을 뽐내지 못하고 추하게 나이 들어 버린다. 우리는 어쩌다 제대로 단풍이 든 나무를 보면 그 색과 자태에 빠져 걸음을 멈췄다. 가을에 흔한 단풍을 이리 귀하게 보게 될 줄이야. 나는 그중 예쁘게 물든 단풍잎을 하나 주어서 간직했다.


소요산에는 원효 대사와 요석 공주의 이해하기 힘든 사랑 이야기가 곳곳에 스며있다. 당나라로 유학 가다가 해골물을 마시고 다시 돌아온 원효는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일심 사상을 실천했다. 삼국 통일 후 불교를 정신적 기반으로 삼으려는 문무왕은 거리로 내려온 파격적인 스님 원효가 필요했다. 왕은 혼자가 된 딸 요석공주와 그를 맺어주기 위해 물에 빠뜨리고 옷을 말리라고 요석궁으로 보냈다. 혈기 넘치는 스님과 깨달음을 갈구하던 공주는 사랑에 빠졌다. 원효 대사는 사흘 동안 공주의 처소인 요석궁에 머물렀고 그 후 공주는 아들 설총을 낳았다. 그러나 원효는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산으로 떠났다. 공주는 아들을 데리고 남편 원효 대사가 있는 소요산에 왔지만, 지엄한 구도의 길을 가는 지아비를 만나지 못하고 공주봉에서 하염없이 절만 했다. 그리고 산밑 어딘가에 거처를 마련하고 살았다. 아들이 멀리서라도 아버지의 지혜를 닮기를 바랐다.

절에 들어가기 전 세속의 사랑에 빠졌던 원효 대사는 진정한 사랑과 이별을 겪고 나서 더 깊은 도의 세계에 도달했을까. 요석 공주의 지아비 사랑은 함께 한 시간이 짧아서 더욱더 애절했을지 모른다. 단 3일을 보냈어도 진정한 교감을 나누고, 그 남자의 아이를 낳고, 그를 만나기 위해 험한 길을 떠났다. 어차피 얼굴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누가 더 사랑하는가 하는 자존심을 내세우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공주는 아직도 공주봉에서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딸만 있는 친구는 떠난 남자를 못내 그리워하는 여자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괜히 부아가 난다고 말해서 우리는 웃었다.


원효 대사가 창건했다는 자재암 옆에서 원효 폭포는 사랑을 매몰차게 외면한 원효 대사처럼 고집 세게 떨어진다. 원효와 같이 유학을 떠났던 의상의 이름을 딴 의상대, 나한봉을 지나 공주가 험한 산세를 넘어 이르렀다는 공주봉에 도착했다. 1,500년 전 사랑의 온기가 남아있어서일까. 가까이서 황량하게 보였던 도시는 널따란 정상에서 한결 따스해 보였다.


불타는 가을 산을 보지 못해 실망한 우리는 하산하여 자연산 버섯전골로 아쉬움을 달랬다. 능이 버섯, 목이버섯, 노루궁뎅이 버섯 등 산에서 나는 귀한 버섯이 잔뜩 들어가고 특별한 양념을 하지 않은 국물에서 가을이 깊어진 산과 맑은 물의 향기가 났다. 단풍이 들지 않아도 초록의 나무가 빽빽한 산과 오래된 절, 그곳에서 전해지는 천 년 묵은 사랑 이야기, 그리고 함께 산행하고 뜨뜻한 버섯탕을 나누어 먹을 친구들이 있어서 좋았다. 집으로 가는 길 내내 산 너머 하늘을 물들인 짙은 오렌지색 석양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했다. 지금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오래된 사랑 이야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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