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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을 실현하면

47산 칠보산(2022년 2월)

by Claireyoonlee

우리나라에 산이 많아서일까. 호기심과 욕망이 많아서일까. 인간은 산을 정복하고 기록을 남기려 한다. 나는 ‘내 맘대로 100산’을 주제로 글을 쓰지만, 공식적인 100대 명산 인증을 하는 친구들이 있다. 나나 그들이나 ‘정복욕’은 매한가지다. 우리는 이 땅에 있는 산을 함께 다니며 감동을 나누고, 더 높은 곳으로 가고자 하는 욕망을 채운다. 이번에도 또 한 명이 칠보산에서 100산 완등을 했다.


투명하게 맑은 하루는 아침 안개로 시작한다. 우리는 구름같은 안개를 뚫고 산 근처 갱치식당(주인장은 ‘강 위의 경치 좋은 집’이라는 뜻이라고 말해 주었다)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탱글탱글하게 윤기 나는 밥은 입에 넣자마자 스르르 녹았고, 명란젓으로 간을 한 아삭한 콩나물 해장국은 감칠맛이 났다. 곰탕은 가마솥에서 갖은 한약 재료를 넣고 오랫동안 끓인다고 했다. 산골 인심이 풍성한 아침밥으로 산행 전 속이 든든했다.


충북 괴산의 칠보산(778m)은 속리산 국립공원에 속한다. 떡바위산장 앞에서 다른 친구들을 만나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바위가 많은 속리산의 묘봉 상학봉 산행 코스와 다르게 칠보산 정상으로 가는 길은 흙길이고 경사가 완만했다. 기온은 낮았지만 바람이 불지 않고 따스한 햇볕으로 땀이 나서 두툼한 겉옷을 벗었다. 밟아도 깨지지 않는 두꺼운 얼음이 계곡을 하얗게 덮었어도 푸른 기운을 잃지 않은 싱싱한 소나무가 많아서 산은 온통 초록으로 젊었다. 키가 큰 활엽수는 안간힘을 다하여 끝이 없이 높이 자란 기둥 하나로 버티고 있었다. 모처럼 맑은 날씨라 집도 절도 보이지 않는 산이 첩첩이 이어진 황홀한 풍경을 보았다. 콧노래가 저절로 나오는 가벼운 산행이었다.


높은 산이 이어진 부드러운 곡선이 잔물결처럼 넘실대는 정상에서 우리는 100번째 명산을 오른 친구를 축하해 주었다. 산의 개수가 뭐 중요하냐고, 그런 인증에 연연하냐고 비웃을 수 있을까. 우리나라 구석구석에 있는 100개의 명산을 차례로 ‘정복’하는 과정은 절대 쉽지 않다. 고요한 속리산 줄기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친구의 노력과 열정, 그리고 그 욕망의 성취를 좀 별나게 축하했다. 진심 어린 축하의 분위기는 정상의 차가운 공기를 잠시 뜨겁게 했다.


들뢰즈는 칸트, 프로이드, 라캉, 푸코등 이전의 철학을 분석해 받아들이고, 문제점을 찾아내어 자신만의 철학 이론을 성립했다. 그의 복잡한 사유를 전부 설명하기 어렵지만, “욕망을 어디에 두는가(욕망의 배치)에 따라 아주 작은 형태(분자적)의 변화를 일으켜서 결국 큰 사회변화가 일어난다.”라고 요약할 수 있다.* 어떤 큰 사건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욕망으로 발생한 작은 단위의 사건을 먼저 봐야 한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사회라는 큰 단위를 말했지만, 개인이 욕망을 어디에 배치하는지에 따라 일어난 작은 변화로 인생에는 커다란 변곡점이 생긴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 바란다. 그것을 실현하면서 일어나는 변화가 삶 자체를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산 밑 식당에서 이어진 100산 축하연에서 친구들은 선물을 주고, 이름으로 삼행시를 지어 멋지게 읊었다. 100번째 산을 오른 친구는 몇 년 전 한 달 동안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하고 책을 출간했다. 책 속에는 하루에 20km 넘게 걸으면서 겪은 일과 깨알 같은 정보, 그리고 길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100산에 도전하려고 한 것도 순례길 성당에 도착할 때마다 도장을 찍으면서 만끽한 성취감을 다시 맛보고 싶어서였다고 말했다.


우리는 친구가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감탄했다. 한편으로는 각자의 가슴 속에 비밀스럽게 품은 욕망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위대한 철학자의 사유를 몰라도 된다.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바라고 그것을 실현하면서,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이 조금 더 나아지기를 꿈꾼다.


친구는 책에서 “자신의 분야에서 치열하게 살아온 젊은 날을 뒤로 하고 내려놓는 늙지도 젊지도 않은 나이에 나와 이웃 그리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정리 혹은 정립하고 싶은 마음으로 야고보 성인의 길을 걸었다”라고 썼다. 이것은 같은 또래의 우리가 절실하게 품고 있는 바람이기도 하다. 인생은 허탈하다고, 회한이 많다고 하면 뭣하겠는가. 바라는 바를 하나씩 성취하는 길에서 자칫 늘어진 고무줄같이 될 수 있는 현재는 죄어져 팽팽해지고 조금 더 나은 나를 만든다.


친구는 책을 마무리하면서 순례길 후유증이 혹독함을 고백하고, 파올로 코엘료의 메시지를 인용한다. “이 세상에는 한 가지의 진실이 있지. 뭔가를 온 마음을 다해 바라면 반드시 이뤄진다는 거야. 뭔가를 바라는 마음은 곧 우주의 마음에서 비롯하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는 게 이 땅에서 자네가 맡은 임무라네.”


*≪고쿠분 고이치로의 들뢰즈 제대로 읽기≫ - 고쿠분 고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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