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2025년 1월)
따뜻한 남쪽 나라 제주에도 눈이 많다. 한라산은 겨우내 하얀 모자를 쓰고 있고, 중산간의 도로 양옆으로 눈더미가 녹지 않고 쌓여 있다. 육지에서는 마른 가지에 눈이 쌓여 추워 보이는데, 섬에는 푸른 잎사귀 혹은 화사한 꽃잎 위에 쌓인 눈이 오히려 포근해 보인다.
표선의 한 바닷가 찻집에서 눈이 오는 자태를 바라보았다. 건축상을 받았다는 근사한 ‘카페 아오오’는 바다를 보기에 최적화해 지어졌다고 했다. 제주에 오면 맛있는 공기를 마신다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이리저리 걷고, 뛰어다녔다. 그런데 이번에 우리는 독한 감기를 앓고 난 끝이라, 앉아서 밖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특별히 무엇을 하지 않아도 허투루 보낸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바다가 아닌가. 겨울 제주를 즐기는 평범하고 소박한 방법이다.
나는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한강 작가가 표현하려고 했던 ‘눈’을 떠올렸다. 주인공 경하는 친구 인선의 앵무새를 구하기 위해 서울에서 출발하여 끊임없이 내리는 눈을 뚫고 중산간에 있는 친구 집에 간다. 작가가 표현한 것처럼 바다 위로 내리는 눈은 하늘과 바다 사이 어디선가 누군가 흩날리는 종잇조각 같기도, 바다를 떠돌다가 사라지는 하얀 새 떼 같기도 했다.
처음에는 새들이라고 생각했다. 흰 깃털을 가진 수만 마리 새들이 수평선에 바싹 붙어 날고 있다고. 하지만 새가 아니다. 먼바다 위의 눈구름을 강풍이 잠시 흩어놓은 것이다. 그 사이로 떨어진 햇빛에 눈송이들이 빛나는 것이다. 해수면이 반사한 빛이 거기 곱절로 더해져, 흰 새들의 길고 찬란한 띠가 바다 위로 쓸려 다니는 것 같은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제주에 머무는 동안 휴대 전화에는 대설, 폭설, 산간지방 도로 폐쇄 같은 문자가 계속 올라왔다. 그래서 우리는 산 위로는 얼씬도 하지 않고 해안 근처의 숙소 근처만 왔다 갔다 했다. 하지만 기온이 낮고 바람이 불어 산 아랫마을에도 눈은 쌓였다. 밤에 가로등이 없는 도로를 지날 때는 하얗게 쌓인 눈더미가 불빛처럼 길을 비추었다. 검은 하늘에서 반딧불 같은 눈송이가 이리저리 반짝이며 내렸다.
우리는 숯이 진짜라는 참숯가마에 들어가서 육지에서 영하의 날씨로 얼었던 몸을 녹였다. 잘 익은 연시 같은 주황색 불이 붙은 숯에서 무시무시하게 뜨거운 열이 뿜어 나왔다. 한겨울 밤,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숯가마처럼 뜨겁게 더웠던 섬의 여름을 떠올렸다. 제주의 겨울을 보내는 또 한 가지 좋은 방법이었다.
바닷가 바람이 거칠 줄 알았는데 소금막 해변에는 보드라운 햇볕만 가득했다. 밤새 내린 눈이 쌓여 손바닥만 한 모래사장이 하얬다. 맑은 하늘에는 구름이 낮게 떠서 흐르고, 바다는 유순했다. 한 친구는 신이 나서 펄쩍펄쩍 뛰는 순둥이 반려견과 놀고, 또 한 친구는 눈이 쌓인 해변과 바다, 뭉게구름이 신기하다고 사진을 찍어댔다. 나는 맨발로 해변을 달렸다. 눈이 녹은 모래가 발바닥에 닿는 느낌이 차가웠지만 좋았다. 우리가 제일 처음으로 왔는지 모래 눈밭에 세 사람과 한 마리 강아지의 발자국만 선명하게 찍혔다. 무지하게 더웠던 지난여름,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여기서 수영을 했었다. 볕이 좋은 겨울의 해변에서 나는 제주의 아픈 역사를 떠올렸다.
제주의 해변을 보고 슬픔이 차오른 이유가 있다. 1947년부터 7년 동안 무고한 제주 사람들은 ‘빨갱이’라고 몰려 거의 ‘절멸’될 뻔했다. 우익 무장대는 젊은 남자를 찾다가 찾지 못하면 어머니, 누이, 할아버지, 할머니를 대살(代殺)했다. 그리고 그들은 총살당해 바다에 버려졌다. 무정한 바다는 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그들을 삼켰다. 제주 사람들은 그 후 한동안 바닷고기를 먹지 못했다고 한다.
총살했던 자리는 밤사이 썰물에 쓸려가서 핏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습니다. 이렇게 하려고 모래밭에서 죽였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바닷고기를 안먹어요. … … 살만해진 다음부터는 이날까지 한 점도 안먹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갯것들이 다 뜯어 먹었을 거 아닙니까. ≪작별하지 않는다≫
우리가 머문 숙소 마당에 있는 티트리 나무에도 눈이 소복하게 쌓이고, 크리스털 같은 고드름이 처마를 장식했다. 바람이 불면 우듬지에 쌓인 눈이 떨어져 또 눈이 온다고 생각했다. 눈이 와서 더 고요한 밤에 숙소 주인장이 귤 한 바구니를 들고 찾아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침에는 그녀가 끓여준 시원한 옥돔국을 우리는 한 그릇씩 비웠다. 낚시로 잡은 싱싱한 생선이 그때 그 ‘바닷고기’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제주의 아픔이 잠시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언제 가도 넉넉하고 소탈하게 우리를 반겨주시는 숙소 ‘애옥’의 대표님 부부. 환대는 제주의 겨울을 따뜻하게 해 주는 또 하나의 방법이었다.
“인간이 인간에게 어떤 일을 저지른다 해도 더 이상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상태”에 있던 그 섬에는 지금도 눈이 올 때마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몰아칠 때마다 “그들이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겨울 제주는 아직도 섬 곳곳에 남아있는 한과 “뻐근한 사랑”을 생생하게 전해주었다. 만족스럽고 풍성한 겨울 여행이었지만, 돌이키고 싶지 않은 슬픈 역사가 자꾸 떠올라 당분간 눈이 오는 제주에는 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