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쉬혼 현대 미술관, 스미소니안 미국 미술관
외국에 사는 아들은 ‘해외동포’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나의 ‘해외동포’ 큰아들은 1년에 한 번 마음 먹고 휴가를 내서 온다. 30살이 넘더니 기특하게도 친구보다는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을 더 많이 갖겠다고 했다. 나는 아이가 머무는 동안 필요한 물건을 사러 같이 돌아다니고, 순댓국, 도가니탕 같은 먹고 싶다는 한국 음식을 사 먹였다. 정성껏 집밥도 해 먹였다. 어느 날은 큰아들과 작은아들까지 데리고 일식당에 갔다. 식당 주인은 장성한 아들 둘과 온 엄마를 보고 놀랐다며 드문 일이라고 했다. 딸과 오는 엄마는 많이 봤어도 아들들이 엄마와 식당에 잘 오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다 큰 아들들을 양옆에 끼고 세상 어느 엄마보다도 뿌듯하게 밥을 먹었다.
아이는 대도시 직장인답게 걷기에 익숙해져 걷자고 하면 기꺼이 따라나섰다. 성큼성큼 걷는 아이의 뒷모습이 낯설고 애틋했다. 언제 저렇게 나이가 들었을까. 인왕산에 올라가서 서울 전경을 경이롭게 바라보는 아이는 또 아주 소년 같았다. 나지막한 집들 사이로 청와대와 경복궁의 지붕이 부드러운 선을 이루는 비 온 후 서울 강북은 씻은 배추처럼 싱그러웠다.
아들과의 데이트 코스에는 미술관이 들어있었다. 그라운드 시소에서 워너 브롱크호스의 그림을, 국립 현대 미술관에서 론 뮤잌의 전시를 보았다. 거칠고 두꺼운 붓질을 한 배경에 운동하는 사람을 극사실적으로 그린 브롱크호스의 그림은 왕년의 미대생을 매혹했다. 아들은 화실 카페에서 화가의 그림에 영감을 받아 비슷한 그림을 그렸다. 아들과의 미술관 데이트는 내 인생 어떤 데이트보다도 달콤했다.
애들이 청소년이었을 때에는 데리고 나오기가 얼마나 어려웠던지 기억이 났다. 미국 학교의 긴 여름 방학이 시작하면 일주일에 한 번만이라도 함께 무엇인가 같이 하자고 애걸했다. 맛있는 음식이나 필요한 물건을 사준다고 꼬셔서 간신히 아이들을 데리고 나왔다. 전공은 아니지만 피아노를 치는 작은 아이와 미술을 전공하기로 한 큰아이에게 워싱턴 미술관을 구경시켜 주고 싶었다. 아이들의 ‘젊은’ 취향에 맞추기 위해 허쉬혼 현대 미술관과 스미소니안 미국 미술관에 데리고 갔다.
내가 미술 관람 공부(브런치 북 smithonian1,2,3)를 했던 스미소니안 내셔날 갤러리 오브 아트에는 세계 각 나라에서 수집한 고대로부터 근대까지 미술품이 있다. 허쉬혼(Hirshhorn Museum) 미술관은 바로 그 옆이다. 이 근사한 현대식 건물에는 Damien Hirst, Eric Fischl, Ashille Gorky 같은 동시대 작가의 작품이 나선형 계단을 따라 전시되어 있다.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작가들은 세상을 앞질러 가려고 기발한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한다. 그래서 가끔은 불편하고 역겨운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우리가 보지 못하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려는 예술가를 탓할 수는 없다. 사실 현실은 더 막장이므로.
허쉬혼 미술관에도 백남준의 작품이 있지만, ‘쌤’(SAAM)이라고 부르는 미국 미술관(Smithonia American Art Museum)에는 백남준의 작품이 대세다. 3층에는 그의 작품 《electronic super highway》가 한 벽을 차지한다. 미국 각 주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TV 화면에 넣었다. 작품 앞에 있는 벤치에 가만히 앉아서 작은 화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웃음이 픽 난다. 만약 백남준 작가와 이야기할 기회가 있다면 재미있었을 것이다.
한국 출신이지만 미국 예술가를 대표하는 백남준의 일생은 그의 작품만큼이나 드라마틱하다. 재벌 집 도령으로 태어나 홍콩, 일본, 독일의 학교에 다녔다. 활동은 주로 미국에서 했다. 우리나라 최고의 부잣집이었던 그의 집안에서는 가업을 잇는 아들을 바랐겠지만, 작가는 다른 세계를 찾느라 30년 넘게 고국에 오지 않았다. 부정한 돈이 많고 친일까지 했다고 자기 집안을 부정했듯이 멀쩡한 피아노를 부수고, 미모의 첼리스트가 연주하다가 갑자기 옷을 벗는 것 같은 행위예술(Fluxus)의 선두 주자였다. 이를 비디오에 담아 남기고자 시작한 비디오 아트는 그가 예술계에 남긴 위대한 업적이다. 미국 예술계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예술가로 한 층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는 그의 작품을 보고 나는 자부심과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가 우리나라의 울타리에 머물렀다면 그만큼 크게 되었을까.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가려면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는 ‘내가 예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이 나를 만든다’라고 했다. 소년 백남준같이 반항하는 우리 아들들도 나중에 위대한 누군가가 될 수 있는데 고루한 부모가 길을 막고 있는 걸까 하는 말도 되지 않는 생각을 했다. 무지한 엄마로서 위안이나 희망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억지로 나왔어도 신기한 작품을 발견하면 유심히 보았다. 나는 아이들이 컴퓨터에 몰두하지 않고 예술품 사이를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가슴이 벅찼다. 3층 전시관 출구에는 방명록이 있었다. 나는 ‘백남준 오빠 자랑스러워요.’라고 쓰면서 위대한 미국 예술가가 나의 동포임을 분명히 새겼다.
3주의 휴가를 끝내고 아들은 자기 밥벌이하러 떠났다. 아이들은 백남준 같은 예술가는 되지 못했지만, 지금은 성실한 회사원으로 살고 있다. 백남준의 시대정신과 개척자로서 혼신의 힘을 다해 예술을 했음을 존경하지만, 내 아이들이 예술가가 되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한다. 역시 엄마는 자식 앞에서 무지몽매하다. 이것 또한 나를 위안하는 방법일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