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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도구

조지타운 에피파니 성당의 위기탈출(2012)

by Claireyoonlee

조지타운 에피파니 성당에 위기가 닥쳤다. 주일에 있는 세 대의 미사 중 9시에는 한국어 미사를 드린다. 한국어와 영어에 능통한 본당 신부님에게 다른 성당으로 이동하라는 교구의 명이 떨어졌다. 미국인보다 한국인 신도가 많아서 다른 성당의 신부님보다 좀 더 오래(7년) 부임했으니(보통 4-5년) 전출 명령이 부당하지는 않았다. 쓰러져 가는 성당을 일으키고 한국인 신도들을 이끌던 선하고 유쾌한 목자라도 교구의 명에 순종할 의무가 있다. 신도는 신부님이 떠나서 아쉽고 슬프지만 받아들여야 한다.


문제는 새로 오는 신부님이 한국어를 전혀 하지 못해서 한국어 미사를 할 수 없다고 했다. 작은 성당이라 주일 영어 미사는 두 대(7시 30분, 10시 30분)로 충분하니 9시 한국어 미사를 폐지할지 모른다고 했다. 이것은 우리 한인 공동체 또한 존폐의 갈림길에 서 있음을 의미했다. 사람들은 동요했다. 개신교 교회에서 좋아하는 목사님을 따라가는 것처럼 신부님이 가는 성당으로 가겠다고 하는 사람, 한국어 미사가 없어지면 안 된다고 하는 사람, 그 중간에서 어느 세력(?)이 더 강한지 저울질하는 사람, 집 근처 미국 성당으로 가겠다고 하는 사람으로 공동체는 나뉘었다. 신부님이 가는 성당으로 다 같이 가자고 선동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대놓고 이제 신부님이 떠나니 9시 미사는 마지막이라고 했다. 평소에 신실한 교우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드러난 참모습이 실망스러웠다. 나는 하느님을 바라보는 성당 공동체가 인간의 욕망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한탄했다. 그러나 외로운 미국 생활에서 나를 지탱해 준 성당과 공동체가 어이없이 사라지는 모습을 가만 지켜보고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성당에서 친하게 지내는 자매님들과 이 사태에 관해 의논했다. 모두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했다. 새로 부임하는 신부님을 직접 찾아가기 어려워 우리는 본당 수녀님을 만나러 수녀원에 갔다. 한국인 수녀님들이 몇 분의 할머니를 모시며 사는 수녀원은 메릴랜드 주택가의 푸른 언덕 위에 있다.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했다. 이렇게 한국어 미사가 사라지게 둘 수 없다고 하면서 미사를 유지할 방법을 궁리했다. 신부님이 한국어를 한마디도 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분은 영어로 하고 우리는 한국어로 응답하자고 제안했다. 익숙하지 않은 신자를 위해 미사 전례를 인쇄해서 장의자(pew)에 꽂아두면 도움이 될 것이라 했다. 전무후무한 전례라도 없어지는 것보다는 낫다고 모두 동의했다. 그렇게 유지하다 보면 또 다른 방법이 생길 것이라 믿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런 미사를 할 생각을 했는지 알 수가 없다. 공동체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의지를 가엽게 여기신 하느님의 은총이었을까.


우리는 독수리 형제처럼 공동체를 사수하자고 의기투합했다. 수녀님도 적극 돕겠다고 했다. 수녀님이 새 신부님에게 우리의 의지를 전달하자 신부님도 마지못해 동의했다. 한국어 미사는 반쪽이지만 없애지 않기로 결정되었다! 갈팡질팡하던 사람들은 다시 성당에 모였다.


우리는 그동안 애쓴 신부님이 집전하는 마지막 미사를 드리고, 미국 공동체와 함께 송별 파티를 열었다. 정성을 다해 음식을 준비하고 그동안 찍은 사진으로 동영상을 만들어 다 같이 보았다. 여기저기로 떠날 것 같던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서로 도와 신부님을 보내는 파티에 참여했다. 이별이 있어야 또 다른 시작이 있다. 우리는 새로운 신부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정들었던 신부님을 떠나보냈다.


새로 온 신부님은 주교님의 비서를 할 만큼 전도가 유망한 젊은 사제였다. 무슨 연유인지 한국인이면서 한국어를 하기를 싫어했다. 어눌한 한국말을 하면 성직자로서 권위가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신부님의 부모는 이민 1세대로 근처 메릴랜드 한인 성당의 열성 신자였다. 다행히도 새 신부님의 영어 발음은 명확하고, 천천히 말해서 강론을 알아듣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준비한 대로 신부님이 영어로 하면 신자들은 한국말로 응답했다.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 같은 모두 함께하는 전례는 한국어로 했다. 처음에는 좀 이상했지만, 차차 익숙해졌다. 우리는 9시 한국어 미사가 없어지지 않고, 공동체가 남아있다는 사실이 기적 같다고 생각했다.


새 신부님을 위한 환영 파티도 똑같은 정성을 들여 준비했다. 신부님의 부모님도 왔다. 몇십 년 전, 그들은 예전 신부님이 젊었을 때 부임했던 성당의 신자였는데 ‘신부가 한국말이 어눌하다’라고 비난한 적이 있었다. 훗날 자기 아들이 전혀 한국어를 하지 못해서 한국어 미사가 사라질 위기에 처하게 만들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들은 한국의 여느 부모처럼 아들을 잘 부탁한다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세상은 좁고, 돌고 돌아 제자리에 오는 것일까. 우리는 성당이 새로운 지도자를 만나 더욱 풍성하고 성스러운 하느님의 집이 될 것이라 믿었다.


얼마 후 나는 귀국했다. 이 정든 공동체를 떠나서 어떻게 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쉽고 섭섭했다. 피붙이가 사는 고국으로 가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순종하고 떠난 옛 신부님처럼 나도 떠날 때는 떠나야 했다. 에피파니 공동체는 (내가 없어도) 예전처럼 아담하고 아름답게 굴러가고 있다. 이제 성당 근처에 있는 미국 가톨릭 대학(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으로 유학 온 한국인 신부님을 초대하여 한국어 미사를 드리고 있다고 했다. 완전한 한국어로 말이다. 나처럼 교회를 갈까, 성당에 갈까, 갈등하는 주재원 가족들도 소문을 듣고 성당을 찾아와 신앙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 도움을 받는다. 사람은 떠나도 또 다른 사람으로 채워져 공동체는 살아남는다. 그 과정에서 내가 하느님의 도구로 잠깐 쓰였던 것일까. 하느님의 뜻은 시간이 지나면 알 수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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