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도서……(Libr……)”
줄리어스 애슬로우는 다 떨어져 나간 명판에 간신히 남아 있던 몇 개의 글자들을 읽었다.
“도서관! 글자가 몇 개 떨어져 나가고 없지만 이 정도는 읽어줘야지, 안 그래?”
그는 주위에 늘어 서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의 주위에는 오륙십 명 정도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다들 외모는 젊다. 손에는 칼을 들고, 등에는 방패를 맨 채, 하얀색 옷을 갖춰 입은 사람들. 다들 어깨에 계급 표시를 달고 있었다.
해는 중천에 떠 있었지만, 겨울 날씨는 여전히 매서웠다. 찬바람도 씽씽 불어댔다. 완전히 폐허가 된 대지 위에 콘크리트와 벽돌로 지어졌던, 그러나 지금은 온전하다고 볼 수 없는 그런 건물이 서 있었다. 다른 건물들의 잔해들이 주변에 널려 있었다. 하지만 사람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건축물들조차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무너져가는 중이었다. 온통 쓰레기 천지였다. 다 부스러지고 썩어가고 있는.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하얀 눈이 덮었다. 그렇지만 나무들은 여전히 푸르렀다. 쌓여 있는 흰 눈 사이로 잡초들이 삐죽이 나왔다.
“여, 속이 다 보이네.”
누군가 말을 했다.
“이봐, 이 정도면 양반이야. 내가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는걸.”
다른 누군가 말을 받았다.
도서관은 5 층짜리 건물이었고, 건물의 벽에는 일정한 네모 모양으로 뻥 뚫린 공간들이 있었다. 건물의 경사 지붕마저도 군데군데 부서져 가는 중이었다. 문짝은 다 떨어져 나가고 없어진, 네모난 텅 빈 공간이 건물의 정면에 보였다. 한쪽에 간신히 서 있는 벽면에 ‘세인트 조…… 도서…… ……터(St. Geo…… Libr…… ……ter)’이라고 쓰여 있는 명판이 붙어 있었다. 나머지 글자들은 부서지거나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모여 있던 군인들이 천천히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로비였다. 젊은이들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먼지와 쓰레기와 돌 조각들 뿐이었다. 그들의 눈에 색다른 물건들이 보였다. 만져보니 종이로 만들어져 있었다. 책이었다. 사람들은 책을 집어 넘겨보기 시작했다. 어떤 책들은 먼지로 부서지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책들은 그런대로 모양을 유지했다.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이제는 흰머리가 희끗희끗하면서 눈매가 날카로운 한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뺨이 홀쭉했다. 다 낡은 정식 육군 군복을 착용하고 있었다. 왼쪽 가슴에는 ‘스티븐스’라는 이름표 그리고 군복 칼라에는 대령 계급이 붙어 있었다. 스티븐스 대령은 주위에 서 있는 군인들을 한 번 둘러보더니, 말을 시작했다.
“제군들, 지금 우리는 도서관에 와 있다. 여기는 심한 폭격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이것저것 만져보는 것은 상관없지만, 우리의 임무를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것을 찾아야만 한다. 최소한 그것에 대한 정보라도 찾아야 한다. 스튜어트의 1 소대는 1 층을 점검하라. 애슬로우의 2 소대는 2 층으로 올라가라. 그리고 클린스의 3 소대는 지하실을 찾아보도록 하라.”
“예, 대령님.”
세 명의 소대장들이 대답을 했다.
존 스튜어트 중위는 자신의 1 소대를 이끌고 1 층을 조사하러 출발했다.
줄리어스 애슬로우 중위는 자신의 소대원들에게 2 층으로 올라가라고 했다. 계단은 그리 위험해 보이지 않았지만, 다들 발밑을 조심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소대원들이 다 올라갈 때까지도 애슬로우 중위는 1 층 로비에 서 있었다.
“대체 뭘 어쩌자는 건지.......”
“에라, 모르겠다.”
애슬로우 소대원들의 투덜거림이 들렸다.
2 층에 올라온 애슬로우의 소대원들은 휑뎅그렁한 방을 발견했다. 커다란 방은 테이블들로 차 있었고, 그 주변을 의자들이 둘러쌓다. 한쪽 벽면은 전부 책들로 채워져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처럼, 종이와 먼지들로 쌓여 있었고, 반대쪽 벽면은 앙상한 콘크리트 골조만이 보였다. 골조 사이에는 가느다랗고 녹이 벌겋게 슨 철근들이 불쑥불쑥 튀어 나왔다. 유리창은 남김없이 전부 깨져 있었다. 바닥에는 깨어진 유리 조각들과 밖에서 들이친 눈발로 범벅이었다. 테이블 위는 모니터들이 차지했다. 그것들의 화면은 시커멨다. 애슬로우는 그 중 하나를 툭 건드려 보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다 망가져 버렸네.”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부대원들을 둘러보았다. 미치 일병이 도서관 한편에서 뭔가를 끄집어내고 있었다. 밝은 밤색의 가방. 어깨에 멜 수 있는 기다란 끈이 달렸고, 지퍼로 닫혀 있었다.
“미치, 가져와 봐.”
소대장의 명령을 들은 미치는 가방을 가지고 왔다. 애슬로우 중위는 조심스레 가방의 지퍼를 열고,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가방 안에서는 직육면체 형태의 물건이 나왔다. 그 물건의 표면은 올록볼록 튀어나와 있었고, 양 손으로 잡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총 네 개의 동그란 유리가 달렸는데, 앞쪽에 조금 더 큰 것이 두 개 그리고 뒤쪽에 작은 것이 두 개 있었다. 애슬로우는 이 물건을 두 눈에 대어 보았다. 갑자기 미치가 저 멀리 보였다.
“하하하, 이거 참 재미있군.”
애슬로우는 반대쪽으로 눈에 대어 보았다. 미치의 코만 보였다.
“아하, 이것은 멀리 보이게도 하고, 가깝게 보이게도 하는 물건이로군.”
“미치, 잘 했어.”
그는 미치에게 엄지를 들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미치는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러더니 저쪽으로 뛰어갔다. 애슬로우는 물건을 자신의 윗옷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때 1 층에 있던 부대원들이 2 층으로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스티븐스 대령이 맨 처음으로 올라왔다. 그 뒤를 스튜어트의 소대원들이 따라왔다. 애슬로우는 상의 주머니에서 그 물건을 꺼내 대령에게 내밀었다.
“미치가 이것을 찾았습니다.”
“음, 쌍안경이로군. 쓸모가 많은 물건이지. 예전에는 군인에게, 특히 지휘관에게는 필수품이었지. 이제는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지만.”
“왜 그렇지요?”
애슬로우가 물었다.
“그게 말이지, 쌍안경은 높은 지대에 올라가서 저 멀리에 있는 적들의 동태를 살펴보는 물건이라네. 이제는 이 세계에 더 이상 고지라 부를만한 것들이 별로 없거든. 그래도 일단 가져가자. 챙겨 둬.”
대령이 건네주는 쌍안경을 줄리어스 애슬로우는 받아 들었다.
스티븐스 대령은 스튜어트의 소대는 3 층으로, 애슬로우의 소대는 4 층으로 올라가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대령이 갑자기 스티븐스와 애슬로우를 불렀다.
“중위들, 자네들은 나하고 같이 5 층을 둘러보기로 하지.”
“예, 대령님!”
스튜어트 중위와 애슬로우 중위는 대령의 뒤를 따랐다. 5 층에 올라온 대령은 도서관 한쪽 벽면에 그나마 남아 있던 책들을 살펴보았다.
“이봐, 표지가 튼튼하면서 상당히 두꺼운 책을 찾아 봐.”
이 말을 들은 애슬로우는 ‘딱’하고 손가락을 퉁겼다. 대령은 왼쪽 모서리부터 위 아래로 훑으면서 책을 찾기 시작했다. 애슬로우는 오른쪽 모퉁이로 달려갔다. 스튜어트는 반대쪽 벽에 있는 책꽂이를 살펴보러 갔다. 벽에 있는 책장의 제일 아래는 수납장이었으며, 이 수납장 위로 삼단으로 만들어진 책꽂이가 있었다. 그래 봐야 전체 높이는 채 2 미터가 안 되었지만, 이런 형태가 삼면으로 둘러져 있었다.
“대령님, 정확히 어떤 것을 찾으십니까?”
스튜어트 중위가 질문을 했으나, 대령은 아무 말이 없었다.
“쳇, 버릇이 나오시는군.”
애슬로우 중위는 투덜거렸다.
그때 애슬로우의 눈에 어떤 책이 들어왔다. 표지는 어두운 밤색이었고, 가죽으로 싸여 있었으며, 상당히 두꺼웠다. 애슬로우는 얼른 그 책을 꺼냈다. 그리고 대령을 쳐다보았다. 그의 곁으로 대령이 다가왔다. 줄리어스 애슬로우는 책을 넘겨보았다. 많은 사진들이 있었다. 그리고 사진들의 아래에는 짤막한 설명이 붙어 있었다. 스튜어트 중위도 옆에 와서 같이 들여다보았다.
하늘로 솟은 빌딩들.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거리. 한낮의 거리. 캄캄한 밤. 항구와 배. 다양한 사람들을 찍은 사진들이었다. 신이 난 사람들, 힘들어 하는 사람들 그리고 홀로 있는 사람들.
갑자기 대령이 하나의 사진을 가리켰다.
사진의 왼쪽에는 커다란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중앙에 있는 도로에는 많은 마차들이 있었으며,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도로의 양쪽에 있었다. 줄리어스 애슬로우는 사진의 아래에 추가되어 있는 설명을 읽었다.
“부활절, 5번가, 1900. 한 대의 차가 보이는데, 앞쪽을 향하여 오고 있는 중이다.”
(Easter, Fifth Avenue, 1900. One car visible, coming towards foreground.)
“중위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겠는가?”
대령이 질문을 했다.
“모르겠습니다.”
애슬로우가 대답을 했다. 그러자 대령은 스튜어트를 쳐다보았다.
“대령님, 1900 년 부활절 날 5 번가를 찍은 사진입니다.”
“좋아, 대단히 좋아.”
대령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미리 알려주는데, 여기가 우리의 다음 작전 목표가 될 거야.”
두 장교들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