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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경민 Mar 09. 2021

정로환의 비밀

갑자기 복통이 나거나 설사를 하게 되면 먹던 약 정로환. 이 약은 요즘도 많은 이들이 가정상비약처럼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로환이 국내에서 보급된 것은 1972년.

동성제약 회장이 일본 다이코 제약의 전 공장장에게 술대접을 거하게 하고 제조법을 전수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 말인 즉 정로환은 원래 일본에서 개발된 약이라는 것. 그런데 그 이름의 유래를 알면 과연 우리가 이 약을 정로환이라고 불러도 되는 걸까 찜찜해진다. 


정로환은 원래 일본어로 征露丸이었다. 露는 러시아를 뜻하는 것이고 征은 정복한다는 말. 丸은 둥그렇게 만든 알약. 그러니까 정로환은 러시아를 정복하는 알약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배탈약 설사약 이름을 왜 정로환이라고 지었을까? 역사는 러일전쟁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러일전쟁 발발 직전인 1902년 오사카의 약품상이던 '나카지마 사이치 약방'은 진통제인 크레오소트를 주성분으로 하는 환약을 충용정로환(忠勇征露丸)이라고 이름 붙여 오사카부로부터 판매 허가를 받았다. 1902년은 영일동맹을 체결한 해로, 러시아와의 긴장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그런데 일본 제국주의 육군은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위장약으로 사용하던 크레오소트 환약을 ‘정로환’(征露丸)이라고 명명한 뒤 전 장병에게 복용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동성제약이 다이코 약품 전 공장장으로부터 비법을 전수받아서 국내에서 정로환을 판매해왔는데 이 약이 크게 인기를 끌자, 다른 제약 회사들도 같은 이름의 약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타격을 입게 된 동성제약이 보령정로환을 내놓은 보령제약을 상대로 상표권 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은 정로환은 보통명사라고 하면서 보령제약 손을 들어줬다. 이후로 많은 제약회사들이 너도 나도 정로환이라는 이름의 약을 생산해 팔기 시작했다. 

군국주의 일본 제국주의 육군이 한반도 침략 와중에 벌였던 러일전쟁을 앞두고 러시아를 정복하자는 뜻으로 만든 배탈약 ‘정로환’을 국내 제약회사들이 너도 나도 앞다퉈 사용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이런 뜻을 가진 정로환이 보통명사라고 판결했던 당시 재판부는 도대체 이 어원을 알고 판결을 내렸을까? 우리는 이 약 이름을 지금도 정로환이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이런 역사를 알고 배가 살살 아파오면서 씁쓸해지는 건 필자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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