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대한해협에도 해빙기는 오는가
툰드라에도 여름은 온다
“긴 빙하의 터널을 빠져나가자 봄 세상이었다”
꽁꽁 얼어붙은 한일관계, 과연 해빙기를 맞이할 것인가? 한국의 새 정부 출범을 계기로 두 나라에서 기대의 목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엄혹한 현실을 반영하듯 기대치가 그다지 높지만은 않다. 일본의 FNN(후지 뉴스네트워크)이 최근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윤석열 후보의 당선으로 한일관계가 좋아질 것이라고 답한 사람은 8.7%에 불과했다. 73% 이상은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답한 것이다. NHK의 여론조사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25%가 좋아질 것이라며 기대를 나타낸 반면 59%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며 부정적으로 반응했다.
한일 간에 켜켜이 쌓인 갈등의 무게를 말해준다. 양 국민간 감정과 불신의 골이 심산유곡임을 반증한다.
위안부 문제, 강제징용 문제, 수출규제와 지소미아 문제 등 그 어느 것 하나 풀기 쉽지 않은 것들이다.
그렇다고 현재의 이 불편한 관계를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북한의 핵 미사일 고도화로 인한 안보 위협이 날로 고조되는 상황이다. 균열을 서둘러 봉합해야 한다. 한미일 삼각 협력 체제를 복원해야 한다. 풀기 어려운 것들은 뒤로 미루자.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 꼬인 실타래는 한 가닥씩 풀어야 하는 법이다.
먼저, 셔틀 외교 복원이다. 두 정상이 만나 대화의 물꼬를 터야 한다. 역사문제와 독도문제로 냉랭했을 때도 노무현과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서로 상대국을 오가며 대화의 끈을 놓지 않았다. 대화를 통한 해결 의지를 안팎에 드러내는 것이 관계 회복의 시작점이다.
둘째, 김대중 오부치 선언의 구현이다. 일본의 과거 식민지배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사죄를 토대로 한 미래지향적 협력관계 구축이 1998년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의 핵심이다.
셋째, 조선통신사의 선린우호 정신을 되새기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일본의 잔혹한 침략에 따른 엄청난 피해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2백 년 간 12차례나 통신사를 보내 선진문물을 전수해주었다. 대마도에서 에도를 거쳐 닛코에 이를 때까지 조선통신사 일행이 지나는 곳마다 수많은 인파가 몰려 환영했다. 일본 막부는 막대한 재정을 쏟아부으며 4백~5백 명에 이르는 조선통신사 일행을 극진히 대접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한국이 일본보다 국력이 열세였던 시기는 일제 강점기를 포함해 백 년이 채 되지 않는다. 수천 년간 우위를 점했다. 한자와 불교를 가르쳐준 것도 한국이었다. 일본 왕족의 몸에는 백제 왕가의 피가 흐르고 있다.
넓은 아량을 갖고 일본을 대해도 된다. 이제는 넓은 배포의 ‘형님 외교’로 일본을 보듬어줄 때도 되었다.
그래서 5월 10일 대통령 취임사가 중요하다. 새 대통령의 취임 연설은 국내에 보내는 메시지와 더불어 주변 국가를 향한 시그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건 8월 15일 광복절 기념사다. 김대중 오부치 선언을 뛰어넘는 메시지를 담아내야 한다.
일본도 화답해야 한다. 같은 날 종전 기념식에서 일왕과 총리의 기념사 역시 1998년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의 정신을 담아내야 한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다.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담은 1993년 고노담화와 주변국 침략과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표한 1995년 무라야마 담화를 무력화하려는 시도는 더 이상 없어야 한다.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정치인들의 집단 참배도 중단되어야 한다. 상대를 자극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신뢰가 회복된다.
과거를 직시하고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더 이상 꾸물댈 시간이 없다. 새 술은 부대에 담는 게 좋다. 윤석열 기시다 선언을 기대한다. 코로나도 물러가고 명동과 하코네에 다시 상대국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그곳은 설국이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의 첫 문장이다. 이 글귀처럼 한일관계도 긴 터널을 뚫고 해빙기의 봄 세상을 맞기를 기대해본다.
영하 50~60도의 동토의 땅 툰드라에도 영상의 여름이 오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