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마디 Sep 16. 2022

11. 나의 원룸 (상)

테트리스

벗어나고만 싶던 내 집을 이제야 그려본다


작년부터 여행할 때마다 꼭 드로잉을 한 권씩 해 오는데 막상 집에 돌아오면 그런 내가 그렇게 모순일 수가 없다. 내 공간은 모른척하면서 밖에 나돌아 다니면서는 자잘한 것 까지도 다 그려대다니. 언젠간 내가 사는 이곳도 기록을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 2년이 지나간다. 떠나기 전에 미루던 숙제를 했다. 내 짐을 가장 많이 끌어안고 살아준 가구들을 그렸다.


1. 옷장

이 집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삿짐을 싸다 싸다 집 자체가 짐이 되어버린 집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동안 숱하게 이사를 했어도 계절 옷쯤은 부모님 집에 두고 오곤 했는데, 2년 전에 본가를 떠날 때는 초등학교 졸업사진액자까지 다 들고 왔다. 그 집에 다시는 안 갈 마음으로.


옷장이 하나뿐이라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이전 계절 옷은 접어서 압축팩에 넣고 새 계절 옷은 압축팩에서 꺼내고 하루 종일 빼고 채우기 테트리스를 했다. 옷장은 100개도 넘는 잡다한 물건을 싹 가릴 수 있는 귀중한 가구이다. 아마 큰 문짝이 달린 옷장이 없었다면 얼기설기 높이 쌓은 물건은 매일 쏟아져내렸을 것이다. 이 원룸에는 1미터 너비의 옷장이 하나 있는데 옷뿐 아니라 등산, 캠핑, 수영 용품을 꽉꽉 눌러 담은 박스까지 넣어야 해서 빈 틈이 없었다. 이런 물건에 밀려서, 원래도 없는 옷인데 계절마다 솎아내느라 더욱 줄어갔다.

 

아프리카 배낭여행 전에 회사에 다닐 때는 매일 정장 스타일로 입었었는데, 여행에서 돌아와 관광안내사로 일할 때는 유니폼을 입어서 따로 오피스룩을 살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대학원에서는 매일 작업실 의자에 앉아있으니까 편한 옷만 찾다 보니 점점 트레이닝 바지, 고무줄 바지, 반바지만 많아지고 신발 또한 구두는 경조사용 몇 켤레만 남겨두고 운동화에서 샌들, 최종은 슬리퍼로 진화했다. 블라우스도 코트도 안 산지 오래고 맨투맨과 점퍼만 꺼내놓고 입었다. 이번 여름 친구들과 만날 때 보면, 다들 편하게 걸치고 온다지만 나만 유난히 나시티에 짧은 반바지 그리고 슬리퍼나 샌들을 신더라고. 서른이 넘었는데 착장이 너무 자유로운가? 더운 여름 몸을 조이고 달라붙는 게 싫어서 점점 짧아지는 옷만 입다 보니 덕분에 옷장이 가볍다. 친구들이 옷장을 보고 여름옷이 이게 다야? 할 정도로 강제 미니'멋’라이프를 실천하게 되었다.



2. 책장

6 중에 중간층은 바닥이 휘어질 정도로 책장에 책이  찼다. 책장 지분을 보니까 나의  편식이 놀랍다. 50% 미술책(화가의 전기나 에세이, 미술 이론, 그림책..) 30% 아프리카, 여행, 역사책. 그리고 나머지 20% 자기 계발, 에세이, 철학, 소설, 사놓고  읽은 주식책도 2. 압도적으로 미술과 여행이 많다. 순전히 내가 공부하는 분야의 지식을 얻으려고 책을 읽는 거지 이렇게 문학 파트가 없어서야! 상상력은 없고 죄다 현실이야!  내게 로맨스가 없는지 알겠다!


사실 2년이 멀다 하고 이사를 다니며 지겹게 짐을 싸다 풀다 하다 보니 책을 잘 안 사게 됐다. 음식은 먹어서 없애고 옷은 유행 지나면 버리는데 낡은 책은 괜히 또 애틋해지잖아. 두 번 읽으면 몰랐던 교훈을 발견할 것 같고. 하지만 누워서 인스타 보며 시간을 버릴지언정 절대 같은 책을 두 번 읽지는 않지. 그렇게 못 버리고 쌓이다 보면 이사 갈 때 부피 대비 가장 무거운 짐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정직한 육면체 책은 박스에 차곡차곡 빈틈없이 쌓인다. 사과박스 뇌물이 괜히 몇 억 씩 되는 게 아냐!

그런데 대학원에 오니까 교수님이 언급하시는 책들은 다 대단한 책 같아서 아묻따(아무것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사다 보니 책장이 한도 초과. 얼마 전 대학원 2년간 인터넷 서점 주문내역과 도서관 대여 내역을 세 봤는데 100권이 넘더라. 거기에 서점이나 박물관에서 한 두 권씩 사온 책, 교수님이 교실에 채워줘서 읽은 그림책까지 세면 아마 셀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 책장 안의 책은 진짜 내 마음에 드는 책만 모셔왔기 때문에 보고 또 꺼내봤다. 그야말로 많은 책에 둘러싸여서 2년을 보냈다. 책을 백 권 넘게 봤으니 2년 동안 한 게 아예 없진 않네. 지금은 집 보러 오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짐이 없는 척을 해야 해서 책장을 천으로 가려놨는데, 새로 가는 집에는 전면 책장을 두고 내가 좋아하는 책을 앞으로 넓게 펼쳐놓고 싶다. 예쁜 표지만 봐도 행복해지게. 꺼내서 읽지는 않더라도.



3. 침대

만약 침대 밑에 서랍이 있었으면 훨씬 많은 짐을 안 보이게 처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리만 덜렁 있는 침대라서 침대 밑 공간을 활용 못하는 게 늘 아쉬웠다. 무릎 꿇고 먼지 청소만 겁나 해야 되고. 다음 집에서는 침대 밑에 짐을 구겨 넣지 않아도 넓게 쓸 수 있으면 좋겠다.


토퍼는 처음 이사 올 때 인터넷으로 샀는데, 고르고 골라 후기가 1만 개가 넘고 별점도 다 좋은 상품으로 샀다. 배송을 받고 공장에서 씌워서 보낸 커버를 벗겨 손빨래해보니 땟구정물이 줄줄 나왔다. 리뷰에 ‘다들 벗겨서 빨아서 쓰세요’ 올리니까 곧바로 고객센터에서 전화 와서 리뷰를 내려주면 10만 원이 넘는 가격을 환불해주겠다고 회유했다. 난 제품은 좋으니까 커버만 빨아서 쓰시라는 말을 하고 싶던 것뿐인데… 굉장히 양심이 있는 사람이 되느냐, 굉장히 양심이 없는 사람이 되느냐 기로에 서게 되어 부담스러웠지만… 네이버 페이를 더 얹어준다는 말에 그만 리뷰를 좋게 고쳐주고 말았다. 여러분, 제품은 좋아요. 2년이 지나도 꺼짐 없이 잘 쓰고 있어요. 진짜로요. 10만 원에 양심을 조금 수그리는 사람이니 너무 믿지는 마시고요.


머리맡에는 주말에 늦잠 자고 일어나 읽는 베겟머리책 하나, 매일 아침저녁으로 쓰는 감사일기 노트 하나가 있다. 요즘은 집 문제 때문에 여러 사람과 씨름 중이라 싸우기 전 날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을 한 챕터씩 읽고 전략을 장전해간다. 감사일기는 새해에 새 노트로 바꿔서 쓰고 있다. 아직 3월일 때 반을 넘게 써서 ‘어머나~ 올해 두 권은 쓰겠네~기특해~’ 했는데 4월부턴 감사할 일이 없어졌는지 빼먹는 날이 많다. 작년 초, 전 남친이 미워질 때부터 미워하지 말고 감사한 점을 떠올려 보자 하고 쓰기 시작했는데 계속 계속 미워지다가 끝내 헤어졌고, 이제 헤어졌으니 미워할 이유가 없잖아요. 감사할 이유도 없고요. 좋은 기억 준걸로 감사하게 해 주세요 하고 더 썼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을 멈춘 것만으로 감사일기 너의 소임은 다 했다. ‘저 사람은 왜 내 마음을 몰라주지’에서 ‘내가 내 마음 알아주자’로 바꿔 생각하게 됐으니까.


창가에는 이집트에서 가져온 수집품을 진열했다. 칸일 칼릴리 시장 조르디 마켓에서 팔던 싸구려 유리 향수병에 바하리야 사막에서 필름통에 반 줌 가져온 모래를 넣었다. 다합 해변에 굴러다니던 새끼손가락만 한 산호도 하나 가져왔다. 언제고 떠올리면 따뜻한 바람이 뺨에 스치는 이집트. 꼭 다시 가야지.


창가엔 액자도 있다. 대학원에 와서 재학생 과제전을 매년 열었다. 찾아와 준 친구들 사진을 모아 붙여 작은 액자를 세워놓았다. 전 남친과 놀러 다니며 찍은 사진도 있었는데 헤어지면서 떼 버렸다. 뗀 부분이 그대로 텅 비어서 그냥 액자를 엎어놓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5. Q역 10분, 8000/20 월세, 12평, 투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