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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동 언니 Nov 16. 2024

마마 왜 내 심장은 가짜야?

김필선 - 마마

흔히들 잘 되면 내 탓, 못 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살면서 누구 탓을 가장 많이 했는지. 우리 엄마. 나는 사랑하는 우리 엄마 탓을 제일 많이 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아니 그조차 잘 말하지도 못하면서. 


"마마 왜 내 심장은 가짜야?" (김필선 - 마마)


김필선 씨는 로봇의 목소리를 빌려 자신을 창조한 ‘마마’에게 질문을 하며 노래를 시작한다. 질문의 탈을 쓴 원망을. 순수한 질문이라고 하기에는 그 뒤 가사의 어미가 수상하다. ‘다들 물어본다고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웃으며 안기는 질문은 아니다. 다들 나를 이상하게 보잖아요, 물어본단 말이요, 로 이어지는 이 말은 눈물을 글썽이며 엄마의 가슴을 마구 때리는 말에 가깝다. 어린 로봇은 대답을 듣기 전에 억울한 듯 외친다. 나도 당연히 삶의 무거움과 슬픔을 안다고. 그리고는 또 묻는다. ‘마마 왜 내 심장은 차갑지’


물론 노래의 초점은 따뜻한 마음을 갖고 차갑게 태어난 로봇에게 맞춰져 있다. 그 괴리에서 오는 슬픔의 정서와 주저앉은 듯한 목소리가 어우러져 저쪽 깊은 무언가를 건드린다. 하지만 불속성 효녀는 로봇의 속사정보다 ‘마마’ 한마디에 제 발이 저렸다. 나도 문제가 생길 때마다, 오롯이 나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낳은 사람을 찾았기 때문이다. 


“엄마, 나는 왜 이렇게 예민해?”  “나는 왜 이렇게 생겼어?” 


왜 나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더 피곤하고, 사는 게 힘들게 느껴지고, 만족을 못하고, 세상을 겉도는지. 아픈 내내 자주 엄마를 붙잡고 물었다. 내심 나를 태어나게 한 책임을 묻고 싶어서였을까. 


알고 있다. 나는 한두 살배기가 아니라 삼십여 년째 세상과 싸워온 하나의 인간이고 나 자신은 더 이상 ‘낳아진’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온 삶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이제 곧 사십 대가 되면 내 얼굴과 인상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도 했다. 주름과 표정, 눈매와 살결 등 모든 것이 내가 살아온 궤적을 반영하기에. 


사실은 그걸 몰라서가 아니라 이 괴로움을 나눌 사람이 없어서 비겁하게 엄마 탓을 하고 엄마를 찾았다. 방에 틀어박혀 있다가 안방의 엄마를 찾아가서 나의 가슴이 꽉 막힌 이유를 알았다고 토로하며 울기도 했다. 엄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자신과 꼭 닮은 큰 딸. 늘 자랑스럽고, 속 썩이는 법이 없던, 어른스러운 딸이 부스러져 내리고 있었다. 나는 엄마 탓을 했지만, 아마 엄마는 자신의 탓을 했을 것이다.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닐 무렵 몇 년에 걸쳐 한동안 많이 아팠다.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우울, 불안을 동반한 마음의 병을 앓았던 것 같다. 이 글을 쓰면서 다 자란 지금도 엄마에게 어떻게 아팠냐고 자세히 물어볼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요즘은 많이 괜찮아졌다지만 여전히 잠이 오지 않는 날, 힘에 부치는 날이면 엄마가 자주 꺼내 먹는 약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덕분에 내가 두려워하면서도 스스로에 대해 의심을 하고 신경 정신과를 찾을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본인의 굴곡을 지나오면서도 항상 엄마로 있어주었던, 엄마를 나는 의지하고 원망하고 또 사랑했다. 가족 구성원들 중에서도 유일하게 나와 함께 울어줬던 엄마를. 


약 복용을 시작하고 나서, 가족들 사이에서는 ‘이 애는 아픈 애’라는 인증 마크가 나에게 붙었다. 그것은 나에게 일종의 면책 특권을 주었다. 예민하고 못되게 굴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용서받을 수 있는. 그 면책 특권을 십분 누리면서도 나는 나를 예민하게 받아들여주지 않기를 바랐다. 내가 잘못된 게 아니고 무딘 세상에 잠시 상처 입은 피해자라고 생각해 주길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정상이지만, 나를 배려해 주기를. 모순적이고 이중적인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당연히 배려해 주려고 좋은 마음을 먹은 가족들과도 다투는 일이 잦았다. 내가 그런 거 아니야! 라며 소리쳐댔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가 영화였다면 사건과 갈등, 주제에 따라 깔끔하게 가족 각각의 입장이 정리되고 오해를 풀고 속 시원하게 막을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실화 속에서 나는 이 마음의 실타래를 풀지 못한 채 그냥 가족들의 체념과 배려가 뒤섞인 포옹에 몸을 맡겼다. 엄마와 나, 우리 가족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찌 됐든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으므로. 짜증 내고 울고 싸우고 미워하다가도 우리는 결국 어떻게든 서로를 안았다. 


아직도 미욱한 나는 꽁해있는 부분이 있고 가족이 언급하지 않았으면 하는 나의 단점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서로를 등지지 않는 어떤 연결이 나를 구원했다고 생각한다. 실타래를 푸는 대신 우리는 이것을 안고 안아서 녹여버리기로 했다고. 


그리하여 나는 김필선 씨의 노래로 돌아가, 이제야 미약하게 다시 이해한다. “마마”라고 부르며 시작하는 말의 의미를. 엄마를 부르면, 그건 치트 키니까. 내가 그 뒤에 무슨 말을 하며 어리광을 부리고 말도 안 되는 강짜를 부려도 결국은 안아줄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꼬인 마음을 갖고 간다 해도. 그것에 핀잔을 주든, 웃어 넘기든, 같이 고민을 하든, 해결을 하지 못하든. 안아줄 것이다 엄마는. 그것에 대한 믿음으로 오늘도 나는 나의 고향을 부르는 것이었다. 


엄마, 덕분에 나 오늘 하루도 잘 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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