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
어제는 말도 없고 탈도 없는 평범한 우리 식구들의 가장 큰 연례행사인 '김장 데이'였다. 나는 시댁에서 김장을 한다. 친정은 김치를 사 먹는다. 우리는 몇 년째 김장을 시작하기 전, 롯데리아 불고기버거를 먹는다. 루틴이다. 운동을 마친 후 바로 앞에 롯데리아에서 세트를 몇 개 주문한 후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그랬더니 무슨 일인지 벌써 김장이 끝나간다는 말을 들었다. 반은 어리둥절했고 반은 기뻐서 입꼬리가 스을쩍 올라갔다. 근처 카페에서 인원수 별로 커피까지 사서 바리바리 싸 들고는 시댁으로 향했다. 도착해 보니 정말 김장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일단 맛을 보라는 시어머니의 말씀에 김치 한쪽을 쭉 찢어 먹어 보았다. 그런데 올해 김치는 맵찔이인 내 입맛에도 맵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다른 가족들의 생각도 같았다. 그냥 올해 산 고춧가루가 안 맵나 보다 하고는 김장을 마저 이어 나갔고, 나에게는 김치통을 깨끗이 닦아 뚜껑을 닫는 임무가 주어졌다. 내가 도착하고 30분 정도 후엔 모든 김장이 끝났고, 잠시 소파에 앉아 쉬고 있던 그때, 주방에서 시어머니의 비명이 들려왔다.
"김치 양념에 마늘이랑 생강을 안 넣었다. 어쩌냐."
어머님의 한 마디에 남은 가족들은 모두 그대로 굳었다. 그리고 시동생이 그 침묵을 깼다. "괜찮아, 그래도 맛있었어. 그냥 먹자." 막내아들의 만류에도 어머님은 김치를 다 끄집어내서 다시 양념을 묻혀야 한다고 주장하셨다. 며느리인 나는 그저 웃었다. 전 날부터 양념 만드신다고 고생한 시아버지는 화를 내셨다. 우리 남편도 다시 못 한다고 한사코 어머님을 말렸다. 사실 저걸 언제 다 다시 꺼내서 또다시 양념을 바른단 말인가 싶었지만 어머님이 그렇게 하자고 제안했을 때 반대할 생각은 없었다.
결론은, 김장 리플레이.... 였다. 착한 두 아들이 엄마의 손을 들어주었다. 여기서 안 한다고 뻐겨봤자 우리가 각자 집으로 돌아가면 엄마 혼자 저 많은 배추를 다시 끄집어 내 양념을 덧바르고 있을 것이라는 안 봐도 뻔한 상황이 눈에 훤했기 때문이다. 착한 아들들과 그저 다수의 의견을 따를 생각이었던 착하지도 못되지도 않은 며느리는 다시 고무장갑을 끼고 앞치마를 둘러 매고 쭈그려 앉아 김치에 마늘과 생강이 담긴 양념을 바르기 시작했다. 시아버지도 툴툴 대시긴 했지만 군소리 없이 어머니가 지시하는 대로 허드레 일을 도와주셨다. 그래도 이 일은 1시간 정도만에 끝이 났다. 생각보다 힘들지도 않았고 어머님을 위로하고 모두가 즐겁게 옛날이야기를 꽃피우며 일사불란하게 몸을 움직여 금세 마무리를 할 수 있었다. 가족 간의 협동심이 돋보이는 작업이었다.
어쩌다 일을 두 배로 한 가족들은 모두 배가 고팠다. 원래 김장 날에는 보쌈을 집에서 직접 해서 갓 한 김치와 함께 식사를 하지만, 어제 만큼은 보쌈을 배달시켜 먹었다. 어머니도 힘이 부치셨고 직접 고기를 삶게 되면 시간도 두 배로 걸리기 때문이었다. 결혼식을 가야 하는 시동생을 제외한 우리 식구들은 맛있게 밥 한 공기를 뚝딱하고는 1년 중 가장 큰 행사인 '김장'을 마쳤다.
마늘과 생강을 다시 바르고 김치를 넣고 있는 그때였다. 어머니는 매실액을 안 넣었다는 것을 또 생각해 내셨다. 우리는 모두 강력하게 고개를 저었다.
"세 번은 못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