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

사랑은 고양이의 발자국 같은 것

by 정윤

자세히 보면 집안에 고양이 발자국 모양대로 찍힌 물자국이 있다. 밟고 나서 양말이 젖어서야 알거나, 빛에 비친 장판을 보면 알게 된다. 또 유자인가 보다.

엥 집사야 그게 무슨 말이냐 내가 범인이라니


샤워를 하는 동안은 변기 커버나 세면대에 앉아서 기다린다. 그리고 내가 샤워부스를 나오면 물이 흥건한 화장실 바닥으로 내려와 샤워부스로 들어간다. 꼭 한 바퀴를 돌고 나온다. 유자의 젤리 사이에는 잘라주지 못한 털들이 삐져나와있어서 화장실을 갔다 나온 유자의 발은 물걸레가 따로 없다. 자는 내가 화장실에만 가면 꼭 같이 있으려고 한다. 습기 차고 더운 화장실이 좋은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혼자 살 때는 힘들고 외로운 마음을 달래 보려 의미 없이 뜨거운 물을 틀어놓고 오래도록 멍하게 있었다. 갖은 생각을 다 했다. 내가 풀지 못한 문제, 아직 만들어두지 않은 나의 저녁 메뉴, 그리고 이 순간에도 지나가고 있는 시간들까지 흘러가는 물에 고민을 흘려보내진 못했다. 샤워를 하는 동안 채워진 따뜻한 온기 덕에 바깥에서 찬 바람을 맞으며 살아가는 시간과는 다르게 내가 위안을 받을 수 있는 시간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고양이 동생들이 생기고부턴 아이들이 나를 기다리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가급적 빨리 샤워를 마치려 한다. 샤워를 하면서도 이따금씩 유자를 가만히 부른다. 뿌연 샤워부스 유리 너머로 유자의 눈길이 느껴진다. 뭐가 이렇게도 걱정이 되는 건지, 나를 따라 화장실까지 와준다. 변기 커버 위에 앉아 꾸벅꾸벅 졸더라도 곁에 있겠다는 결의가 느껴진다.


다소 비범한 얼굴로 화장실을 지키는 유자


유자가 물을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다. 유자는 내 손에 은근히 남은 물기만 닿아도 꾸에엥하고 울고, 몸의 물을 연신 핥아내는 평범한 고양이다. 한 번은 화장실 바닥에 고인 물을 핥으려고 하길래 유자를 들어서 깨끗한 물이 받아진 세숫대야로 데려갔다. 내가 유자를 목욕시키려 한다고 생각한 건지 품 속에서 길길이 날뛰었다. 이렇게 물을 무서워하는 유자이지만 왜 화장실까지 따라다니나 싶을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가 집사라면 그 이유를 대강 알 것이고, 고양이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은 궁금하겠지만 사실 답은 없다.


나는 듬직한 유자


하지만 그 덕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을 배운다. 바닥의 물을 밟고 나서야 떠올리는 것일지라도 이건 유자의 사랑일 테니까. 유자는 사람의 말을 할 수 없으니 내게 사랑한다 말하지는 않는다.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편지로 할 수도 없다. 그런 유자가 최선을 다해 나에게 보여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은 내 주변에 머무르는 것이다. 비록 유자가 무서워하는 물이 도처에 있어도 나를 지켜주려 함께 있고, 가끔은 내가 화장실에 있지 않아도 화장실에 가서 나를 찾기도 한다(?). 빈 화장실에서 나를 찾느라 울어대는 유자를 부르면 '엥? 거기 있었어?' 하는 표정으로 머쓱하게 나오기도 한다.


내게 사랑을 표현할 방법인 글과 말이 없었다면 어떻게 사랑을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을 해보았는데, 유자처럼 내가 주변에 있음을 보여주었을 것 같다. 보이지 않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때까지 천천히,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켰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무서워하는 것이 있지만 너를 지켜주려고 여기에 함께 있다는 것을 표현했을 것이다.

한 자리를 지키고 가만히 있는 고여버린 물을 삶에 비유하면 이는 차갑고 죽은 것 같아서 싫지만, 내 곁을 가만히 지키는 유자를 떠올리면 다시 따뜻해진다. 사람에게 고여있는 것은 서로의 온기를 지키는 일이다. 유자는 내게 고여서 나를 채운다. 오늘도 고양이 동생들은 말 대신 무형의 마음을 건네며 어딘가에 조용히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도 유자는 용기 있게 고여 있는 물을 향해 외친다.

야옹!

집사야 여기 있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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