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자주 하는 생각은 결국 어떤 식으로든 드러난다는 말을 믿는다. 평소에 못 먹고사는 것도 아니고, 음식에 대한 욕심이 많은 것도 아닌데 글만 쓰면 이상하게도 밥이 덩달아 자연스레 떠오른다. 김이 올라오는 밥솥을 열어보는 느낌. 보기만 해도 배가 불러서 그런가? 자꾸 글을 쓰다가 밥에 대한 생각을 한다.
밥을 지을 때면 자신이 없어 괜히 언덕밥을 짓는다. 한쪽은 높게, 한쪽은 낮게 쌓아서는 그 날의 취향에 따라 퍼먹자고. 이도 저도 아니면 섞어 버리면 대충 비슷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말이다. 보다시피 혼자 살 땐 대충 챙겨 먹고살았다. 먹는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땐 사는데 지장이 없을 만큼의 소량만을 먹고살았다. 입은 더 짧아졌고, 나름 입맛이 까다로워져서 진밥과 된밥에 대한 기호가 생겼다.
진밥이 싫다. 밥 알갱이가 안 느껴져서 그런 것 같다. 침대에 누워서 가만히 있는 나의 모습이 그렇다. 물속에 잠겨있다. 침대에 한 번 누운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겨우 일어나서 무언가를 하는 것도 허우적거린다.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함에도 누워있는 나는 생각만 한다. 일어나면 이런 글을 써야지, 하는 생각만 하다가 또 잠든다. 나의 침묵은 시끄럽다. 속으로 많은 생각을 삼키느라 목이 메어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글은 나중에 좀 더 생각해봐야지, 하고는 메모를 하고 끝낸다.
침대 위의 나는 모든 것을 나중으로 미룬다. 물에 잠긴 진밥처럼 풀어져있다.
나는 된밥이 좋더라. 겉도는 쌀알을 일일이 챙겨야 하는 수고로움마저 좋다. 간혹 젓가락으로만 밥을 먹으면 밥그릇 바깥으로 나도는 밥알을 살펴야 한다. 침대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킨 나의 모습이다. 신경 쓰이는 것도, 신경 쓸 것도 많다. 일어나는 순간부터 피곤할 일이 너무나도 많다. 그 덕에 글감을 부지런히도 찾을 수 있다. 어떤 날은 눈뜨자마자 발치에서 나를 보고 있는 나의 고양이가 그렇다. 또 어떤 날엔 지나다가 본 철제 대문 위 모서리에 핀 꽃 한 송이가 내 맘에 나뒹군다.
마음에 걸리적거리는 모든 것들을 살뜰하게 살펴 모은다. 스마트폰의 메모장에, 들고 다니는 손 메모장에 적어둔다. 다 모아두었다가 언젠간 글로 완성하면 내 여린 마음을 다져줄 것들이니까.
일어나서 돌아다니며 본 것들을 잘 정리해둔다. 어떤 식으로 글을 써볼까 고민하다 잠이 들면, 금방 또 일어날 시간이다. 그때부터는 글을 쓰는 시간이다. 대충 글을 다 썼다 싶으면 취사 버튼을 누르고 기다린다. 시간이 지나서 남들한테 보여줄 용기가 생기면 글을 올린다. 연기가 걷히고 나면 뜨거운 열을 이겨내고 밥솥과 내가 공들인 하얀 밥이 드러난다.
나는 밥 짓는 시간이, 따뜻한 연기가 퍼지는 시간이 좋더라. 언덕밥을 지어 적당히 중간을 찾아 밥을 먹는다. 풀어진 밥알처럼 침대 위를 굴러다니다가도 힘이 나면 또 힘내서 침대를 나서겠지.
글 짓는 시간이, 내가 따뜻하게 데워지는 시간이 좋다!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로 나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바닥을 짚으며 살았던 때부터 글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덕인지, 아니면 그쯤부터는 밥을 제대로 챙겨 먹고 산 덕인지.
잘 모르겠다. 글을 쓸 때 나는 삶을 사랑하게 된다. 밥을 조금이라도 챙겨 먹고 길을 나선다. 배가 든든한 나는 실수한 것을 탓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게 되었다. 무심히 지나칠 법한 것들을, 오래도록 씹고 또 삼키면 손가락 끝으로 흘러나와 글이 된다. 지금 당신이 읽고 있는 이 모든 글은 내가 겪은 것이자 내가 소화한 나의 시간이다.
밥심으로 산다고도 하는데. 글을 쓰는 것이 재밌어서 산다고 해야 하나. 밥심으로라도 힘내려고 하는 것처럼 자꾸 글을 쓰는 동안 밥을 떠올리는가 보다, 한다. 이제는.
생을 사랑하게 되는 시간, 내 삶에 힘을 보태어 줄 것들.
안타깝게도 밥으로 글을 쓰고 노래를 부르는 나는 위장이 별로 좋지 않아 자주 체한다. 내가 겪었던 고난은 소화를 못 시켰던 시간일 뿐이다. 체하긴 해도 토하면서 살진 않으니까! 적당한 선에서 만족하는 소담스러운 순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