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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도착은 했지만,

보스턴 생활기 4편

by 윤슬

경유지인 토론토 공항, 새우잠과 수하물 찾기


새벽에 도착한 토론토 공항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제 우리의 유일한 바람은, 연착은 걸렸으니 수하물 분실만은 피해 가자는 것이었다. 캐리어 두 개는 비교적 빨리 나왔지만, 단프라 두 개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새로운 수하물들이 여러 차례 컨베이어 벨트에 등장했지만, 우리 짐은 보이지 않았다. 늦게까지 함께 기다리던 승객들과 알게 모르게 동지애 같은 것이 생겼지만, 그들도 자기 캐리어를 찾아 사라지고 우리만 덩그러니 남았다.


신기한 것은, 가장 좌절해야 할 이때부터 오히려 피곤과 해탈이 겹쳐 별 타격을 느끼지 못했다. 그냥 그러려니 하며 부스에 있던 직원에게 도움을 청했다. 시스템으로 여권을 확인한 직원이, 우리 짐 두 개가 큰 짐으로 분류되어 벨트를 통과할 수 없었다며 따로 보관 중인 창고를 안내해 줬다. 창고 문 틈으로 보이는 반가운 단프라 박스! 짜릿한 즐거움을 느끼며 당연히 왔어야 하는 수하물을 행운으로 받아들였다. 고객의 기대를 낮추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인천공항 카운터에서 체크인할 때, 에어캐나다 카운터에서 짐을 미리 맡아줄 수도 있으니 일단 찾고 한번 물어보라고 들었다. 그런데 에어캐나다 카운터에는 물어볼 직원이 없었고, 우리는 결연하게 받아들였다. 캐리어와 단프라를 카트에 열심히 싣고 편안한 의자를 찾아 토론토 공항을 누볐다. 소소한 행복은 에어캐나다에서 받은 25달러 상당의 카드였는데, 토론토 공항의 카페나 편의점에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스타벅스에서 시작된, 7시간의 기다림. 많은 짐과 함께 기다리는 과정이 고될 것 같았지만, 남편에게는 길었고 나에게는 그리 길지 않았다. 갓 탈출한 따끈한 백수에게 출근하지 않는 모든 시간은 즐거울 뿐인가 보다.


보스턴행 비행기 탑승 3시간 전에 체크인 카운터가 열렸다. 이제 여정이 끝나간다는 안도감이 들기도 전에 위기는 다시 닥쳤다. 카운터 직원이, 우리 수하물은 검색대에 들어갈 수 없는 크기라 모두 열어 검사해야 한다고 했다. 이 소식이 암담했던 것은 우리 짐이 예사롭지 않은 이삿짐이기 때문이다. 단프라 박스들은 터질까 봐 포장하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렸고, 무엇보다 간신히 짐을 욱여넣어 문을 닫은 상황이었다. 다 뜯어서 보여주고, 다시 잘 포장할 수 있을 것인가. 다행히 수동 검사하는 구역에 테이프나 가위는 잘 구비되어 있었다. 긴 비행 이후 밤을 꼬박 새운 상태라, 피곤에 절어 있는 우리는 검사원이 뭘 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검사가 끝나고 재포장할 때는 둘 다 신들린 것 같았다. 누군가 내 몸에 들어와 다시 짐을 싸는 듯했다. 맨 정신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피로였을 것이다.



보스턴, 이제 집이라 부를 그곳


원래 예정되었던 전날 밤이 아닌 하루 지난 아침에 보스턴에 도착했다. 나는 원래 비행을 즐기고 별 걱정이 없는 편이었지만, 최근 비행기 사고가 잦아 이전만큼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어차피 결함이 발생하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겠지만 죽기 전에 기도할 시간이라도 번다는 생각으로 엔진이 잘 돌고 있는지 틈틈이 감시했다.


타성에 젖어 살지만, 사실 우리는 기술과 그 검사를 맡은 사람에게 목숨을 대수롭지 않게 맡긴다. 공학도인 남편은 본인이 하면 할수록 기술을 잘 믿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그것이 운전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직접 운전하기 전에는 횡단보도나 주차장에서 차 가까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갔었다. 자동차라는 기계의 안전함을 그것이 널리 통용되는 만큼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런데 운전을 시작하면서 너무나 많은 부분이 운전자의 재량과 실수에 좌우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은 자동차 옆을 지나다닐 때 항상 그 움직임을 주지한다. 완벽하지 않은 사람이 하는 일이고 그런 사람이 만드는 기계이니 우리 목숨을 보장해 줄 완벽한 기술과 기계는 존재하지 않나 보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무사히 도착했지만, 보스턴 공항에서는 카트를 돈을 내고 빌려야 했다. 킹갓자본주의에서 무료로 제공되는 서비스는 없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되니 우리는 순응해서 돈을 내고 카트를 빌렸다. 그리고 우버를 타고, 이제 집이라고 부를 그곳으로 출발했다.


보스턴에는 눈이 거의 종아리 정도까지 쌓여 있었는데 다행히 도로는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남편이 날씨에 대해 한마디 하자, 우버 기사는 기다렸다는 듯 대화를 시작했다. 흥이 많은 흑인 남자였는데, 그는 보스턴에 눈이 많이 오지만 그러면 거리가 깨끗해지는 느낌이기 때문에 눈 오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나는 현지인과 대화 기회를 얻은 틈을 타서 보스턴에서 자동차가 필요한지 물어봤다. 미국은 워낙 차가 필수라고 들었지만, 보스턴과 뉴욕만큼은 대중교통이 잘 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우리는 돈도 아낄 겸 차를 구하지 않기로 했다. 우버 기사는 보스턴에서 차 타고 다니는 것을 결사반대한다고 했다. 그는 돈을 벌려고 운전하지만, 보스턴은 전철이 잘 되어 있어 차가 필요 없고, 주차비와 유지비가 너무 많이 든다고 했다. 원하는 대답을 들어서 안도했다.


그렇게 우리가 살게 될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모던한 느낌의 아파트였고, 옆으로 길게 뻗어 있으며 층수는 8층 정도로 높지 않았다. 대부분의 미국 아파트 리뷰에서 층간소음 문제가 빠지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탑층을 선택했다. 전망에 대한 기대는 아예 없었지만 그래도 채광이나 프라이버시는 보장되기를 바랐다.


도착 시간이 임대 오피스 운영 시간과 겹쳐, 체크인이 원활히 진행된 점이 좋았다. 오피스 직원인 Peter는 우리 짐을 운반할 수 있는 큰 카트를 빌려줬고 방까지 직접 안내해 주었다. 밤에 왔더라면 짐은 당연히 하나씩 운반해야 했을 것이고 그전에 현관문 열고 키 찾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집에 대한 걱정과 기대가 뒤섞이며 피로마저 잠시 잊혔다. 그렇게 열린 문으로 느낀 우리 집에 대한 첫인상은 아주 좋았다. 채광도 잘 들었고 카펫 없이 마룻바닥으로만 지어졌는데 바닥이나 벽면이 아주 깨끗했다. 페인트칠 흔적이 남아 있는 걸 보니, 입주 전에 부분 도배를 한 듯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건 결국 다른 아파트였지만, 대부분 층이 높지 않아 마주 보는 집이 없다는 점은 다행이었다. 거실은 사진으로 봤던 것보다 넓었고 침실로 들어가면 화장실 옆으로는 작은 창고까지 붙어있었다. 제일 마음에 든 주방은 ㄷ자 형태로, 식탁처럼 쓸 수 있는 넓은 면이 있었다. 세탁기, 건조기, 식기세척기!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아파트라 가전도 깨끗하고 신식이었다.


미국의 좋은 아파트들에는 대부분 식기세척기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2층짜리 식기세척기는 한국에서 쓰던 작은 것보다 훨씬 많이 들어갔다. 처음에는 식기세척기 세제가 아깝기도 하고 너무 커서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백수인데 직접 설거지를 할까 생각했지만, 생활할수록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 깨달았다. 매 끼니 요리해서 먹으면 설거지가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몰랐던 것이다.



소리 '있는' 전쟁


우리 둘의 만족과 Peter의 흐뭇함을 깬 것은 갑자기 돌아가는 펜 소리였다. 어찌나 웅장하게 돌아가는지 상대방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Peter는 히터가 돌아가는 거라고 둘러댔지만, 내가 바로 확인한 온도계는 이미 설정 온도에 잘 맞춰져 있었다. Peter는 현장에서 적발된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이 증상이 계속되면 아파트 정비시스템에 연락하라는 말을 남기고 황급히 우리 집을 떠났다. 펜은 몇 분 더 돌다가 꺼졌지만 소음이 잊히기도 전에 다시 돌기 시작했다. 주기적으로 작동하는 것 같았고 소음에 민감한 남편은 사색이 되었다. 하지만 당장은 이 문제를 해결한 여유가 없었다. 오늘 저녁에 바로 중고로 구매한 가구들을 픽업하러 가기로 되어 있었다. 이대로면 졸음운전을 하게 될 위기였기 때문에 아마존으로 미리 주문해 놓았던 침대만 얼른 바닥에 펴고 우리는 그 위에 쓰러졌다.


알고 보니 펜은 오작동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이 아파트가 원래 그런 것이었다. 온도조절 시스템과 환기 시스템이 같이 연결되어 있어서 온도가 맞추어져도 환기를 위해서 주기적으로 돈다는 것이다. 주변의 다른 아파트들은 그렇지 않다는데 이 아파트만 설계 단계에서 뭔가 잘못된 것 같다.


그래서 우리가 선택한 방법은 아예 두꺼비집에서 난방/환기 전원을 내리는 것이다. 그러면 펜도 멈췄고, 슬프게도 난방과 온수도 멈췄다. 다행히 집이 그렇게 추운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샤워할 때만 전원을 올리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어느 날 누가 우리 집 문을 처음으로 두드린 사건이 있었다. 한 동양인 여자가 서있었는데, 자기가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는데 펜 문제로 정비 시스템을 부르니까 고칠 수 없다고 하면서 우리 집도 같은 일도 정비 시스템을 불렀다고 듣고 찾아왔다는 것이다. 보스턴에 산지 오래됐지만 이런 문제를 겪었던 적은 없다면서 공동 행동에 나서자고 우리를 설득했다. 우리가 꿀팁이랍시고 펜 끄기 방식을 보여줬지만 난방과 온수도 같이 꺼지는 상황에 불만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자신을 Soo라고 소개한 동양인 여자와 우리는 아파트에서 배선 공사를 다시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Soo는 자기가 아파트 관리사무소와 아파트 회사에 이메일을 보내보겠다고 하면서 우리 이야기도 언급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돌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를 참조한 이메일을 받아볼 수 있었는데, Soo는 메일 서명란을 보니 유명 로펌회사 소속의 변호사였다. 그래서 아주 논리적이고 무섭게 글을 잘 썼다. 금방이라도 우리가 소송을 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또 며칠 뒤 Soo에게서 메일을 추가로 받았다. 아파트 회사는 자기 메일을 무시했으며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는 직원이 자기 방에 찾아왔었다는 것이다. 여자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Peter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황당했던 것은 자기한테 아파트가 원래 그런 것을 어떻게 하냐며 미친 듯이 화를 내고 갔다는 것이다. 진상 고객 대하듯이 선심 쓰면서 30일 줄 테니까 그냥 나가라고 말했다고 했다. 그리고 문을 쾅 닫고 방을 나갔다가 화를 덜 냈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돌아와서 화를 내고, 이것을 여러 번 반복했다고 한다. Soo는 직원의 반응에 큰 충격을 받았다. 펜은 그냥 넘어갈 수 있어도 직원의 태도는 넘어갈 수 없다며 아파트 회사에 다시 메일을 보낼 것이라고 했다.


Soo 혼자 고립되게 놔둘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도 따로 메일을 쓰겠다고 했다. 고소할 것 같은 워딩은 아니라 편하게 답장했는지 몰라도 우리 메일에는 답장이 왔다. 아파트를 보여줄 당시에 펜 관련 문제도 알려주게끔 되어 있지만 직원들이 자꾸 놓친다는 내용이었다. 이미 그 놓친 소개를 듣고 이사 들어온 사람은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알 수 없었고, 우리가 언급한 배선 공사에 대한 답변도 없었다.


그 이후로 다른 행동을 계획하는 것인지 아파트 회사의 답변을 기다리는 것인지, Soo에게서 메일은 오지 않았다. Soo가 집을 다시 알아보고 이사하는 것도 고된 일이라고 했었기 때문에 이사를 갈 것 같지는 않았다. 대부분 1년 계약이니, 우리처럼 포기하고 펜 끄기 노예로 살기로 했을 수도 있다.


집을 알아보는 단계에서는 그토록 친절했던 아파트가 입주하자마자 싸늘하게 식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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