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인 피아니스트의 유럽 탈출 프로젝트

미국행을 결심한 엘렌 그리모의 10대 시절 영어 집중 장착과 그 이후

by yoonshun

Hélène Grimaud, “Variations sauvages”, 2003.


뉴욕에 정착한 프랑스 출신 피아니스트 엘렌 그리모(1969-)는 자연으로 둘러싸인 남부의 엑상 프로방스 출신으로, 열두살이던 1980년대 초 파리 콘서바토리에 입학해 도시생활을 시작했다.


그리모는 “어린시절부터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느낌”에, 스스로 “프랑스인이 아닌 익명의 존재로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고 한다. (이후 파리 콘서바토리의 입학 가능 연령은 14세로 상향되었다.) 한때 러시아를 동경하며 열여섯살의 최연소 참가자로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도전했지만 입상하지 못하고, 파리 콘서바토리 대학원 과정 진학 후 곧 그만두기로 결심한 시점에도 그는 아직 스무살을 앞둔 10대 ‘소녀’였다.


당시 파리를 기반으로 전성기를 보내던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Gidon Kremer, 1947-)는 방황하던 그리모에게 자신의 아파트를 내 주었고,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Martha Argerich, 1941-)도 진심어린 멘토로 그리모를 이끌었다.


이후 워싱턴DC를 시작으로 플로리다까지 투어하는 미국 연주 일정을 계기로 파리에 돌아가지 않고, 플로리다 탈라하시의 친구 집에 정착한 그리모는, 예쁘고’ ‘어린’ ‘여성’ 피아니스트를 옭아매는 여러 갈래의 제약들이 일상이던 프랑스에서 벗어나, 전통이나 구습에 얽매이지 않는 미국에서 외모나 나이 같은 편견을 떠나 온전한 전문 연주자로 대우받으며 비로소 자유롭게 독립할 수 있는 기반을 찾아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나에게는 음악이라는 나만의 고유 언어가 있다'고 자신하던 그리모였지만, 미국 투어 시작까지 남은 약 반 년간의 시간동안 영어에 집중하겠다는 에이전시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잘 듣고 경청하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영어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méthode toute personnelle pour mon apprentissage de l’anglais. Écouter et entendre…)


"몸은 파리에 있었지만, 이미 마음은 먼 곳으로 여행 중이었다"고, 세월이 한참 지난 후 이 시기를 회상하며 엘렌 그리모는 말한다. 사랑 이야기부터 베트남 전쟁까지, 고대사극부터 서부극까지 장르를 넘나드는 영어권 영화들을 반복해 보면서, 대사들이 입에 붙을 때까지 따라하고 익혔다고 한다. 영어로 된 영화라면 어떤 것이든, 동네의 비디오 대여점을 드나들며 수십개씩 빌려보던 엘렌 그리모는 6개월 뒤 연락해 온 에이전트와 모든 대화를 영어로 할 수 있게 되었다.


2023년 엘렌 그리모를 주인공으로 공개된 다큐멘터리 "Between the notes"에서는 엘렌 그리모의 '영어 수다'를 마음껏 감상할 수 있는 동시에, 뉴욕을 비롯한 미국의 도시들에서 수십년 간 펼쳐 온 '프랑스 소녀'의 성장 스토리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의 동료들이 농담 반으로 전하는 "She is really French!!"라는 한 마디는 엘렌 그리모의 지난 수십년의 방황과 성취를 요약하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동아시아인들이 어떻게 클래식 음악가가 되는지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있지만, 사실은 유럽인이라고 해서 그 길이 마냥 수월한 것만은 아님을 한편으로 실감할 수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미국에서 프랑스 문학을 전공한 일본인 작가의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