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완성하는 버릇 들이기
감실감실, 꿈틀꿈틀, 간질간질, 살랑살랑, 새살새살… 이른 봄에 태어나서인지, 나는 잘 녹이고, 잘 간질이고, 잘 흔들고, 뭔가 새로운 일을 저지르는 데 선수였다. 심리학을 전공하며 대학원을 준비하다 문득 방송국 아나운서 시험을 보았다. 첫 직장인 방송국을 3년이 채 안 되었을 때 그만두고 미련 없이 비행기를 타고 가난한 여행자의 길을 떠났다. 생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드럼이나 바이올린을 배우기도 하고, 아마추어 밴드를 결성해 콘서트를 열거나 뮤직비디오를 찍기도 했다.
‘문득’이라는 단어를 좋아했고,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을 사랑했다. 지난 삶을 돌아보면, 내 삶은 늘 뭔가를 시작하는 삶이었다. 시작할 수 있는 용기와 추진력 덕분에 다양한 삶의 스펙트럼을 갖게 되었다. 늘 저지르는 걸 좋아했던 과거의 삶에 후회는 없다.
인생의 후반전으로 넘어가면서 시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마라톤을 시작한 용기는 물론 대단하지만, 우리는 결승선을 통과한 선수들에게 박수를 친다. 꼴찌로 들어와도 상관없고, 기록이 형편없어도 관계없지만, 끝까지 완주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존경의 박수를 친다.
아이디어가 떠올라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끝까지 완성하지 못한 원고들이 하나둘 쌓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독특하고 훌륭한 아이디어가 있었다 해도 완성되지 않은 원고는 독자를 만날 수 없다. 그대로 사장된다. 글을 쓰는 일도 마라톤 못지않게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아무리 똑같은 고통을 겪은 주자라 해도 완주하지 못하면 성취감을 느끼지도 못하고 박수를 받지도 못하는 것처럼, 완성되지 않은 원고는 작가가 아무리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 해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 시작이 반이라고 좋아하던 시절을 떠나보내고, 이제 완성을 위해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
“제가 아는 사람들 중에 마흔을 훌쩍 넘기고도 어느 한 가지에 제대로 전념하지 못하는 이가 아주 많은데요. 그걸 보면 신기해요.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를 겁니다.”
앤젤라 더크워스 <그릿> 중
새로운 일을 누구보다 잘 추진했기에 나는 내가 열정이 많은 사람인 줄 알았다. 진정한 열정은 그것을 끝까지 밀고 나아가는 끈기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었다. 말하자면 길에서 지나가는 멋진 남자를 흘긋 보고, 남편을 내팽개치고 그를 따라가는 것은 열정도 용기도 아니라는 이야기다. 가볍고 휘발성 있는 잠깐의 뜨거움은 열정의 본질에 가까이 가지도 못한다. 금방 달궈진다고 해서 뜨거운 사람이 아니라, 그 달궈진 뜨거움을 끝까지 유지하는 사람이 뜨겁고 열정적인 사람이다. 열정은 사실 긴긴 시간 속에서만 증명될 수 있다.
시작만 해놓고 덮어 놓은 소설들, 반 이상 쓰고도 완성하지 못한 원고들을 보니 참담했다. 미완의 원고들을 하나씩 완성하는 데만 집중하기로 했다. 잘 쓰기 위해 애쓰거나, 작품이 성공해야 한다는 부담도 갖지 않고, 오직 탈고하는 데만 집중하기로 했다. 물론 쉽지 않았다. 끝까지 밀고 나아가는 건 새로운 걸 시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영역이다. 도중에 지치고, 상처받고, 지루해하며 언제든 그만두고 달아나고 싶어 진다. 중력과 싸워 이겨야만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다.
세 번째 장편소설을 탈고하는데 꼬박 6년이 걸렸다. 40%쯤 썼을 때 갑자기 상하이를 떠나 베이징으로 이사하면서 뮤즈가 떠나버리기라도 한 듯 도무지 글이 써지지 않았다. 쓰지 못하는 나를 볼 때마다 화가 났고, 이미 쓴 원고마저 모두 삭제해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때, 내가 스스로를 달래며 했던 말은 ‘쓰레기통에 버리더라도 원고를 완성하고 버리자 ‘는 말이었다. 오랫동안 손을 놓고 있었기에 본래 기획했던 캐릭터나 플롯도 가물가물해져 되살려내는 게 불가능했다. 원고를 볼 때마다 실망스러웠지만, 목표가 좋은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글을 완성하는 데 있다고 생각하니 꾸역꾸역 써나갈 수 있었다. 오래 걸렸지만, 그 원고를 완성했다. 퇴고를 할 때마다 거의 다시 한 편을 쓰는 것처럼 많은 수정이 필요했지만, 내게는 완성된 원고가 생겼다. 완성된 원고보다 더 큰 소득은 내가 더 이상 '완성 못하는 감옥'의 죄수가 아니라는 걸 증명했다는 사실이다.
“작가에게 중요한 건 오직 ‘쓴다’는 동사일 뿐입니다.
‘잘 쓴다’도 ‘못 쓴다’도 결국에는 같은 동사일 뿐입니다.
잘 못 쓴다고 하더라도 쓰는 한은 그는 소설가입니다.”
-김연수
글을 쓸 수 없어서 원고를 완성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실은 마무리하지 않고 던져둔 미완성의 원고들이 내 자긍심을 잘근잘근 갉아먹고 있었던 것이다. 잘 쓰든 못 쓰든, 원고가 등단이나 출간으로 이어지든 그렇지 못하든, 원고를 끝까지 밀고 가 탈고할 수만 있다면 자부심을 갖고 계속 글을 쓸 수 있다.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 무조건 완성시키는 습관이 소설가가 되는 최고의 지름길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한만수 <마법의 소설 쓰기> 중
떠오르는 생각을 붙잡아 끼적끼적 한두 문장을 끄집어내며 집필을 시작한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일단 시작을 했다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내 원고를 끝까지 밀고 나가 초고를 완성하자. 저지르는 용기도 매력 있지만, 끝까지 해내는 것이 훨씬 어렵고 가치가 있다. 퇴고를 하면 모든 글은 반드시 좋아진다. 퇴고를 하려면 반드시 완성된 초고가 필요하다.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책과 함께’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강연 신청 및 상위 1% 독서 커뮤니티 무료입장, 1:1 글쓰기 코칭 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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