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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Jun 20. 2024

그냥 '비' 대신 '안개비' '는개' '웃비'라고 하자

아름다운 단어 수집하기

여름마다 두 아이를 데리고 한 달씩 여행을 다녔다. '여행했다'라기보다는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그곳에 '살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듯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거처를 옮기기는 했지만, 머무는 동안은 그곳 사람들 집에서 그곳 사람들처럼 살았다.


웨일스에 한 달 머물 때였다


웨일스에 한 달 머물 때였다. 차가 없는 우리는 우유와 빵 같은 기본 식량을 사기 위해서도 한참을 걸어야 했다. 하버포드웨스트라는 웨일스 남서쪽에 있는 작은 도시에 머물 때, 작은 가게에 가기 위해서도 2,3킬로미터쯤은 걸어야 했다. 그 정도는 문제도 아니었지만, 주일에 예배에 갈 일이 걱정이었다. 마침 블로그를 통해 알게 된 한국분과 연락이 닿았다. 그분은 웨일스인 남편과 결혼해 1년째 웨일스에 살고 있었다. 감사하게도 그분이 다니는 교회에서 제프와 수라는 노부부가 흔쾌히 우리가 있는 곳까지 우리를 데리러 와주겠다고 했다. 


우유와 빵 같은 기본 식량을 사기 위해서도 한참을 걸어야 했다


낯선 땅 웨일스에서 생전 처음 보는 노부부와 인사를 나누고 그분들 차에 탔다. 젊었을 때 초등학교 교사로 일했다는 두 분은 선생님처럼 친절하고 또박또박한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중학교 영어 수업 시간에 배운 정도의 영어 실력으로 많은 대화를 나눴다. 문득 창밖을 바라보며 수가 내게 물었다.

“지금처럼 내리는 비를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

“drizzle, drizzle이라고 해요.”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뒷좌석에 앉은 두 아이와 나는 입속으로 조그맣게 ‘drizzle’ ‘drizzle’하고 있었고, 그 단어를 아름다운 그곳의 풍광과 함께 기억의 창고 속에 담았다.


“drizzle, drizzle이라고 해요.”


비를 표현하는 아름다운 단어가 어찌 영어에만 있겠는가.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사전을 뒤적였다.


안개처럼 가늘게 내리는 안개비

안개보다는 굵고 이슬비보다는 가는 는개,

는개보다는 굵고 가랑비보다는 가는 이슬비,

이슬비보바 더 굵게 내리는 가랑비,

실같이 내리는 실비

가루처럼 뿌옇게 내리는 가루비

노드리듯 오는 날비

채찍처럼 굵게 좍좍 쏟아지는 채찍비

굵직하고 거세게 퍼붓는 작달비

빗방울의 발이 보이도록 굵게 내리는 발비

물을 퍼붓듯 세차게 내리는 억수

좍좍 내리다가 금세 그치는 웃비

한쪽으로 해가 나면서 내리는 해비,

햇볕이 난 날 잠깐 뿌리는 여우비

겨우 먼지나 날리지 않을 정도로 오는 먼지잼이

꽃잎이 비처럼 쏟아지는 꽃비


몰라서 쓰지 않았을 뿐이지 우리말에도 섬세하고 아름다운 단어들이 너무도 많다.


비를 표현하는 아름다운 단어가 어찌 영어에만 있겠는가


모르는 건 이렇게 사전을 뒤적이며 배워서 쓰면 되는데, 언제부턴가 새로운 단어를 찾아 쓰는 걸 포기했다. 쉬운 단어와 요즘 유행하는 파괴된 언어로 글을 써야 사람들이 읽어준다는 편견 때문이었다. 아무리 아름다운 단어라 해도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피로를 느끼고, '너무 올드해'하며 던져 버리는 사람들 탓을 해보았지만, 어쩌면 나부터 단어 공부를 어렵고 피로하게 느꼈는지 모른다. 어차피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단어와 표현을 굳이 공부까지 해가며 써야 할까 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생경하지만 아름다운 단어가 나왔을 때 정말 어렵고 피로하기만 했던가. 독자의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 본다. 책을 읽다가 낯선 단어를 만나면 잠시 멈추고 그 문장에 오래 머무르지 않던가. 그제야 생각이란 걸 하고, 때로 감탄도 한다. 어떤 장르, 어떤 모양의 글이든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아름다운 단어와 다양하고 섬세한 표현을 배워서라도 쓰는 데서 보람을 느낄 수 있다. 그만큼 내 글의 깊이가 더해지고 내 글에 새로운 매력이 더해지니까. 아니, 모든 걸 다 떠나서, 아름답지 않은가. 아름다운 것을 더 알고 싶고, 그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싶어 글을 쓰는 게 아니던가. 


보슬보슬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drizzling’하던 친절한 제프와 수처럼, 나도 그냥 '비 온다' 하는 대신, '안개비가 온다' '는개가 내린다'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웨일스에서 만난 제프와 수를 기억하며




윤소희 작가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책과 함께’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강연 신청 및 상위 1% 독서 커뮤니티 무료입장, 1:1 글쓰기 코칭 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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